교환학생 일기#15 - 쉽게 잊어버리는 당연한 순리.
완벽주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시험이나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에도 나름 괜찮은 특성 중 하나다. 문제는 내 능력이 나의 목표만큼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시험기간만 되면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다. 해야 할 공부는 아직도 너무 많고 내 머릿속에 지식이 들어오는 속도는 너무나 더디고. 게다가 기껏 우겨넣은 지식들은 책을 덮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슬그머니 빠져나가 있기도 하다. 시험을 봐서 공부한 만큼의 성적을 받는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납득하지만 내가 받고 싶은 성적은 내가 공부한 만큼의 이상이었다. 이 심리야말로 정말 근본 없는 이기심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시험기간이 끝나고, 행여나 좋은 성적을 받으면 힘들었던 기억이 조금씩 미화되곤 한다.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분명 나에게 약이 된 것이라고. 좋은 결과의 달콤함이 힘들고 괴롭던 기억들을 자연스레 덮어버리고 만다. 내 머릿속에 조금 더 오래 남는 건 시험기간마다 밤을 새우며 힘들어했던 기억이 아니라 좋은 결과 또는 성적표에 적힌 성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생활을 매 학기 반복했다. 이를 학생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순리로서 당연하게 여기면서.
시험기간만 되면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시험기간이 끝나자마자 스스로에 대한 보상으로서 하고 싶은 활동들을 하고. 그러한 쳇바퀴 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많이 지쳐버렸다. '공부를 하고 싶을 때만 하던 나', '하기 싫을 때는 그냥 안 해버리는 나'는 더 이상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덴마크로 왔다.
욕심이 많은 나는 교환학생을 와서도 시간표를 꽉꽉 채워 넣었다. 내 전공은 달랑 하나만 신청하고 나머지는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석사 과목 '소셜 데이터 프로세싱'과 '머신러닝' 등을 잔뜩 신청했다. 이렇게 신청할 당시에도 이 과목들을 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내가 공부해온 분야도 아닐뿐더러 30 ECTS씩이나 신청했으니까. 시험을 못 보고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테니까.
'머신러닝' 수업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재미있었다. 매주 올려주는 스크립트를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여행을 다녀오는 틈틈이 공부해서 열심히 따라가고 있었다. 보고서도 제출하고 인터넷에서 다른 자료를 읽어가며 수업내용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했다.
그런데 여행이 잦아지고, 사진 정리할 게 많아지고, 브런치에 글도 적으면서 점점 머신러닝을 공부하기기 힘들어졌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머신러닝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고 빠르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숙제들을 먼저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머신러닝 수업의 두 번째 숙제를 냈다.
공부가 밀리기 시작하고 수업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지니 마지막 남은 보고서를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제대로' 숙제를 내려면 여행 하나를 포기하고, 브런치 쓰는 시간을 줄여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쉬고 싶다는 생각에 이곳에 왔는데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 이곳에 오기 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려고 하는 나였다.
함께 교환학생을 온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학점을 가져갈 생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냥 지금의 여유가 너무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자유로운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분명 나도 그런 마음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학점 말고 다른 것들을 얻어갈 생각이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도 힘들게 매달려있는 느낌이다.
세 번의 보고서 중에 벌써 두 개나 제출한 상황이었기에 포기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포기하면 이전까지 내가 숙제를 하는데 들인 노력이 다 무의미해진다고 느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만 더 참고 해볼까 하다가도 이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미래의 나를 상상하게 된다.
오랜 시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답은 생각보다 명쾌하게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의 교환학생 생활을 돌아본다고 상상하니 어정쩡한 머신러닝의 성적보다는 여행 한 번, 정성 들여 쓴 일기 한 편이 더 가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랬다. 애초에 내가 원했던 건 학점이 아니었고, 시작할 당시에만 해도 이 분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막상 학점이라는 열매가 눈 앞에 아른거리니 방향을 잃고 흔들리게 된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가 나에게 중요한 순서대로 일을 해 나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달성하기 쉬워 보이는 일, 이미 많은 노력을 들인 일,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일들을 중요한 일보다 먼저 하게 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이를 바로잡는 것이 참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나는 나의 에너지를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해 포기를 선택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포기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내가 선택한 포기는 예전의 포기와는 달리 부끄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랑스러운 선택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합리화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 스스로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의 단점을 극복하고 내린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확실히, 포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