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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스테파노 Oct 04. 2024

북촌방향(2011)- 위대한 일상의 평범한 도돌이표

우연과 인연은 관계로 갈음된다

성준(유준상)은 네 편의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다. 그는 영화 만들기를 잠시 접고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어느 겨울의 문턱에 서울로 올라온다. 선배 영호(김상중)만 만나고 다시 집으로 내려갈 마음으로 북촌거리에 들어선다. 그러나 그의 간단한 행보 계획과는 달리 북촌에서는 우연과 같은 여러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다.

작업을 같이 한 여배우를 만나고 혼자 들어선 낮술 자리에서 한 무리의 영화학도들을 만나게 되며, 결국 옛 애인 경진(김보경)의 집을 찾기까지 한다. 모호한 시간의 흐름 뒤에 만나게 된 선배 영호는 아끼는 후배 여교수 보람(송선미)을 소개하여 주고 밤늦은 시간 작은 술집 ‘소설’을 찾게 된다. 그 묘한 술집 ‘소설’의 여주인인 예전(김보경)은 옛 애인 경진을 너무도 닮아 있었고, 오묘한 분위기의 술자리 끝에 성준은 예전과 입맞춤을 나누고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예전과의 밤을 보내고 북촌을 떠나는 날 아침, 북촌 길 위에는 눈이 내리고 성준에겐  또다시 뜻하지 않은 만남이 기다리게 된다. 과거에 알았던 사람, 나를 기억하지만 내가 기억 못 하는 사람, 내가 기억하고 싶지만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낯선 사람.


서울의 “북촌”길을 걸어 본 적이 있다면 북촌 골목은 점과 점이 잘 이어진 미로 같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사동에서 계동으로, 계동에서 재동으로, 재동에서 가회동으로,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다시 삼청동에서 인사동으로  돌아오는 북촌의 골목은 돌림 노래의 도돌이표처럼 맴돌게 되어 있다. 영화 ‘북촌방향’은 그러한 북촌 골목의 선형적 회귀성에 덕분인지 몰라도 도대체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같은 장소에서 반복처럼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치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시간의 절대적 진행을 방해한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이야기 <북촌방향>은 특별한 기억이라는 억지로 가두어 둔 하루하루의 일상에 대한 영화적 일깨움이다.


북촌의 이미지가 영화에 어떻게 녹아 있을까?


감독 홍상수의 영화


감독 홍상수의 열두 번째 장편이자 두 번째 흑백영화 ‘북촌방향’은 그의 작가세계에서 벗어남이 없다. 이런저런 설명이 없어도 그의 영화라고 판단할 수 있는 여러 영화적 서사와 영상이 충실히 들어 있다. 그러나 영화 <북촌방향>은 예전의 그의 영화보다 조금 유연하고 편하게 보인다. 오히려 명확하게 나의 영화란 이런 것이다 하고 친절히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마도 화자입장인 성준의 직업이 영화감독이고 그가 만나는 만남이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이라 그런지, 갑작스런 만남과 꼬여 가는 시간의 흐름과 중첩이 불편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그전 작품에서 보여준 그의 오마주와 미장센들에 대한 친절한 총정리판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의 영화는 여행을 가는 영화와 여행을 가지 않는 영화 둘로 나뉜다. 그런데 ‘북촌방향’은 서울에 살던 성준이 서울로 여행을 오는 영화다. 다시 말하자면 절반은 여행자로서의 관찰이고 나머지 절반은 주민으로서의 추억인 곳을 북촌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오! 수정’ 때처럼 흑백으로 제작하였지만, ‘오! 수정’ 때의 흑백은 흐릿한 기억을 위한 장치였다면 ‘북촌방향’에서의 흑백은 모호한 시간을 위한 설정으로  보인다.


비슷한 듯 다른, 그것을 알아챌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홍상수의 영화다. 그의 영화가 급작스럽게 변모하는 것은 아마도 목사들이 세금을 내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영화는 같은 듯 하지만 다른, 다른 듯 하지만 같은,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전체 작품에 대한 조화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상호 텍스트가 되었든 의도한 이야기의 이어가기가 되었든 전체적인 조화에 대한 체험은 그를  내려놓지 못하는 마력임에 틀림없다.


홍상수 감독과 배우들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


홍상수의 영화에는 유난히도 음주와 끽연의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소품적인 도구라기보다 매번 등장하는 일종의 감독의 페르소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음주장면은 감정이 있고 느낌이 있고 생각이 있다. 많이 취한 사람, 덜 취한 사람, 모두 취해 엉망이 된 시간들 그리고 술이라는 고마운 핑계로 기억을 지운 척하는 겸연쩍은 위선들도 모두 이야기 속의 중요한 구성원이 된다. 술자리와 불가분의 관계처럼 보이는 담배도 그러하다.


영화 ‘북촌방향’에서의 술자리는 연속되어 보이지만 매번 새로운 첫날처럼 보이는 시간의 모호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성준의 우발적인 첫 번째 술자리인 인사동 고갈비 집에서의 낮술 장면을 제외하고선, 한식당 ‘다정’에서의 술자리나 술집 ‘소설’에서의 음주 장면은 반복되고 재생되지만, 아주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함께 하는 구성원이 추가되거나 달라지기도 하고, 나누는 이야기는 매 한 가지처럼 보이지만 그 어조나 말하는 방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 술자리의 장면이 바로 이 영화 ‘북촌방향’이 원초적으로 내포하는 시간 흐름의 모호성을 던져 주는 중요한 장치이자 주요 관찰자이며, 화자(話者)다. 결국 술 취해 가는 갇혀버린 시간은 어제일 수도 오늘일 수도 아니면 기억 속의 수많은 날들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담배의 경우는 적극적인 이야기의 개입보다는 ‘극적’으로 치닫는 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쉼표 같은 장치로 보인다. 음주장면 중의 끽연은 물론이고 음주 후의 끽연장면에서는, 앞선 이야기 흐름에 따라 예상되는 극적인 무언가에 대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 식혀주는 효과를 주게 된다. 영화의 처음에 영화학도들과의 충동적인 2차 술자리 이동을 위해 택시를 타고 내려 담배를 문 성준과 학생들의 어색함이나, 갑작스런 옛 애인 성준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두어 개피의 담배를 얻어 내는 경진의 현실적 요청은 우리의 기대감에 브레이크를 잡아 준다. 그 기대는 ‘영화적’이라는 ‘드라마적’이라는 통념과 상투이기 때문이다.


음주는 리얼이다


우연과 인연,, 그리고 말과 관계


영화에서 선배 영호의 후배인 여교수 보람은 ‘소설’에서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오늘 참 신기했어요.
제가 사람을 네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도 우연히 길거리에서.
한 사람은 영화감독, 한 사람은 영화제작자, 한 사람은 영화음악 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가르치는 학생이요.
신기하지요?
그것도 모두 20분 안에
일어난 일이라니까요!”


우연의 일치! 물론 빗대어 딱히 걸어 둘 이유가 없다면 모두가 우연의 일치다. 그리고 이러한 호들갑에 다들 흘려들으며 다른 화제로 옮겨 타기 일쑤다. 그러나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성준을 통해  이야기한다.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
우연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니까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우연에 둘러 싸이고 접하고 스쳐 가지만,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이유’들의 점들뿐이니까요.”


그렇다. 선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리고 그 선들이 만나 이루어 낸 이차원과 삼차원의 공간 속에서 우리가 특별함으로 기억하는 것은 겨우 점 같은 몇몇의 ‘이유’들 뿐인지도 모른다. 결국 이 짧은 한마디의 우연과 인연에 대한 설명이 결국 이 영화를 시작하는 이유였고, 이해하는 전부라는 것을 느끼기엔 우리네 기억이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홍상수 감독인 이전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주인공 중래(김승우)를 통하여 설명한 바 있는 우연으로 가득 찬 우주의 원리에 대해 다시 던져 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우연을 위해 메모 한 줄과 써 놓은 일기에 기초하여 대본도 없는 영화를 이끌고 간다.


지난 유행가에 ‘우연, 우연보다 강한 인연, 인연보다 강한 신의 사랑으로 만나……’하는 대목이 있다. 맞는 이야기 같지만 ‘북촌기행’의 우연과 우주에 대한 생각들에 동조를 하는 지금은 그 가사를 뒤집어 생각해도 무방하다. 가장 강한 연은 바로 우연인 것이다. 가장 인위적이지 않은 만남과 그 만남에 대한 인지가 바로 우연에 대한 발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이 우연들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기억에 담아 둘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말의 역할인 것이다. 우연한 만남에 대해 간증(?)한 보람은 말로 전달함으로써 우연을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둘 여지를 만들었다. 결국 우리에게 특별한 이유라는 것은 ‘말’이라는 도구로 세상에 드러내고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러한 말과 기억들의 연속이 너와 나의 그리고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된다.


성준에게 호감을 느낀 보람이 주문처럼 되뇌는 “감독님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겠어요.”라는 대사의 반복은 관계에 대한 간곡한 주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준은 하룻밤을 보낸 예전에게 말로써 당부를 남긴다. 통신수단이 발달한 요즘은 말 대신 전화와 문자로 대신하기도 한다. 간간이 나오는 전화번호 기억에 대한 확인이나, 경진의 히스테리컬 한 문자들이 관계에 대한 지속을 갈구하는 작은 노력으로 보인다.


말이란 관계를 위한 주요한 매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에는 겉과 속이 있으며, 밤과 낮이 있으며, 극과 극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대하여 담아둔다. 극 중 성준의 선배이자 첫 영화의 주연배우로 조우한 승우(김의성)의 이야기에 그러한 말의 속성을 보여 준다.


“사람들의 동조를 얻으려면
극과 극을 이야기하면 돼요.
예를 들어
'당신은 겉으로는 매우 강하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감성적이거든요..'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하고
동감하거든,,
극과 극으로 말하면 다들 맞는다고 생각해요."



일상의 발견: 모호하지만 하는


홍상수의 영화는 일상적이다. 그래서 활기차거나 밝거나 재기 발랄하지 않다. 일상이란 게 그런 것이다.


일상성은 보 잘 것 없다. 일상적인 업무는 고루하기 그지없고, 비참한 하루이며, 모욕적인 인내다. 무한한 욕구에 대비하여 지속적인 궁핍의 연속이며 박탈되고 채워지지 않는 인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성에는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것만 있지 않다. 일상적인 것은 위대함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상은 위대한 창조의 밑거름이고 쾌락의 집합이며, 목표 달성의 현재다. 그러나 일상적인 것이 비참함으로 더욱 크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일상의 지속성과 모호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상수 영화의 일상은 우연의 채움이다. 앞서 말한 보람의 우연한 네 사람과의 만남은 결국 성준의 마지막 날 아침에 마주친 네 사람과 동일해 보인다. 정말 우연의 일치다. 그렇듯 우연은 특별함으로 선택된, 혹은 인위적인 인과관계의 ‘이유’를 위해 모호함으로 기억된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기도 하며, 아니면 수개월 전, 수년 전의 그날과도 매우 닮아 있다. 그러나 그 모호한 우연으로 채워진 일상이야 말로 시간이라는 선을 만드는 무수한 점들의 일렬 행진인 것이다. 그 시간이란 선들이 결국 삶이 된다.


영화 ‘북촌방향’에서 가장 모호한 인물인 경진과 예전의 혼동과 중첩적인 변화는 그러한 일상의 모호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선택된 기억으로 인한 추억과 미련에 대한 오마주이고 작가적 상상력이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통념적이고 상투적인 만남이고 관계다.


어느새 영화나 문학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하기라는 것은 특별한 이유들의 선택이 되어 버렸다. 결국 문학적 서사라는 것은 특별히 선택된 ‘이유’라는 비일상적인 일들의 연결이고 관계로  그려진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던 일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흘려보낸다. 잡아 두지 않는다. 그것이 감독 홍상수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매소드다. 그것에  동조한다면 일상의 위대함을 인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희귀하게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일상과 같은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산다는 것의 대부분은 일상적인 일들로 채우고 살아간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좌절하고, 다짐하고, 골몰하고 때론 멍 때린다. 어제의 일들이 오늘 일어나고, 어쩌면 데자뷔 같이 일어난 적 없던 일들이 다시 반복되는 것 같고, 시간은 흘러 가지만 내가 사는 삶들의 점들을 쉽사리 연결할 수 없음을 인지할 때, 우리는 오늘 하루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결국 일상적인 삶의 모호함은 인생이라는 커다란 과대망상을 버티어 주는 현실적 시간의 버팀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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