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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복잡하게 허무한 것이 복수야

[리뷰] 영화 <리볼버>

by 박 스테파노

(※ 이 글은 민들레언론 문화모꼬지에 실렸습니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74


코로나 팬데믹이 가져온 여러 변화 중 극장가의 모습도 확연히 두드러진다. 다중이 집합하기 힘든 물리적 제한에 더해 대용량 영상파일의 스트리밍과 공유 스토리징 기술이 발전하며 OTT라는 새로운 매체 소비문화를 형성하여 확산 점유하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에서 극장과 그곳을 일종의 유통망으로 의존하던 영화 제작의 양상도 급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변화에 대한 적응과 대책들이 여럿 도출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화 콘텐츠의 다중 유통 전략이다. 개봉은 멀티플렉스 스크린을 이용하되 개봉 후 OTT 스트리밍으로 바로 서비스하거나, IPTV나 케이블 방송에 근 시간 내에 송출하는 방법이다. 순서 전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엄청난 점유율의 블록버스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개봉 영화들이 이 전략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 전략에는 반작용도 있지만 순작용도 있다. 극장, 스크린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는 최신 작품들을 너무 늦지 않게 즐길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의 N차 관람을 다양한 환경에서 온디맨드 형식으로 할 수 있다. 이런 순기능의 또 한 가지는 여러 요인으로 스크린 극장가에서 저평가받던 수작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점도 있다. 작년 여름 개봉해 평단과 관람객들에게 미지근한 반응으로 저점 평가를 받은 <리볼버>도 최근 OTT에 스트리밍 되면서 다른 평가를 기대하고 있다.


<무뢰한> 이후 오승욱 감독과 9년 만에 합을 맞춘 전도연. 극을 홀로 이끌어 가도 무리가 없는 배우로 자리잡은 그녀의 농익은 연기가 탁월하다.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열린 구조의 복수극, 허무의 미장센


영화 <리볼버>의 기본 서사구조는 복수극이다. 전직 경찰 수영(전도연)은 2년 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를 한다. 윗선이 범죄조직과의 커넥션이 발각되자 모종의 보상을 조건으로 혼자 뒤집어쓰고 수감 생활을 견디어 내었다. 그러나 윗선의 주축이자 내연남이었던 석용(이정재)은 두어 달 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하고, 맡겨 두었던 아파트 등기는 낯선 여자에게 넘어 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범죄조직 이스턴 프로미스에서 주기로 한 7억 원도 중간에서 앤디(지창욱)가 배달 사고를 내고 탕진해 버렸다.


영화는 수영이 자신의 것을 찾아가는 일종의 단서 찾기식 복수 여정을 그린다. 문제는 이 복수의 여정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하드 보일드의 시원하고 스펙터클 한 장면이 없고 생각보다 밋밋하다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개봉 당시 호불호가 갈렸다. 수영의 복수를 완성할 열쇠를 쥔 인물이 황정미라는 전직 무당인데, 그 존재의 그림자만 가득한 채 정작 그녀는 이미 죽은 처지라는 설정이 일종의 허무를 부른다. 이 허무라는 것이 사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일 텐데 화끈한 영상과 요란한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요즘 관객에게 어필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복수는 궁극적으로 허무한 일이다. 복수는 야생의 정의라는 말이 있듯이 무언가 얻기보다는 그저 제자리로 돌려 지켜내는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수영의 복수는 연인이었던 석용의 죽음을 규명하는 헛 힘쓰기를 일찍이 포기했다. 짧은 플래시백으로 석용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사실만 적시하는 화면은 범인이 이스턴 프로미스의 누구인지, 수영과 석용의 애증 하는 선배였던 기현(정재영) 일지, 아니면 제삼자인지 열어 놓은 채 이야기는 흐른다.


복수라는 것이 잘해야 제로섬 게임이라는 것을 아는지 수영도 이 진실 규명에 매달리지 않는다. 극 중 윤선(임지연)과 수영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좀 복잡해요.”라고 윤선이 말하자 “그래. 복잡하네.”라고 수영이 화답한다. 복잡하지만 허무한 것이 복수라는 이야기다.



복수의 이야기는 대화가 대화로 꼬리를 물며 명확하게 드러난다. 임지연, 지창욱, 전도연의 연기를 보는 맛으로도 괘찮은 작품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서늘한 색감의 화면처럼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요즘 영화, 드라마처럼 친절한 전후사정 설명도, 혹여 놓칠까 걱정되어 삽입하는 회상의 힌트도 없다. 그저 매 씬마다 둘에서 세 사람을 화면 가득 채워 이야기로 정황과 서사, 서스펜스를 제공한다, 영화 <존윅>처럼 단계별 과제를 해결해 다음 단계로 가는 일종의 복수 사다리를 만든다. 다만 복수의 과정은 주요 인물 간의 대화로 커버한다. 영화라는 것은 모름지기 이야기의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야기를 알려면 들어야 한다


이야기꾼이란 자신의 서사를 풍성하게 하고 깊이 이해하게 한다. 기억과 꿈, 드라마와 상징으로 가득한 장치를 동원

하여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야기꾼은 듣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본문을 다시 쓰는 것 같은 또 다른 창작활동에 참여하게 해 주어야 한다. 세상은 화면에 대한 집착이 증가하면서 피상적인 수동형 사고가 고착화되고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가짜에 쏠리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이야기의 쓸모, 문학의 쓸모는 일종의 문화 해독제로 작용해야 한다.


<리볼버>를 연출한 오승욱 감독은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으로 영화계에 각인을 남기며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연출작은 <킬리만자로(2000)>과 <무뢰한(2015)>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을 9년 만에 내어 놓았다. 그렇다고 영화일은 멈춘 적 없이 각색, 제작지원, 시나리오 컨설턴트 등 수행했다. 끊임없이 이야기에 고민을 쏟은 감독은 전작보다 더 덜어 내고 덜 만드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유혈 낭자한 극단의 아수라 판을 그린 <킬리만잘로>나 쫓고 쫓기는 하드 보일드의 긴장이 있는 <무뢰한>보다 좀 더 듬성 듬성한 여백이 느껴지는 작품이 <리볼버>다. 세 작품을 관통하는 회색지대에 놓인 처지를 강조하기 위해 주변을 선명한 자극으로 두기보다는 오히려 심심한 열린 구조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이야기의 길을 만들어 준다.

<리볼버>의 수영은 경찰의 신분으로 범죄조직의 하수인이었고, 출소 후 배신 당하고는 그들을 향해 리볼버를 들어 총구를 겨눈다. 자신이 처한 회색의 운명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복수의 이유다. 일종의 상호 텍스트가 다양하게 발견된다.


<킬리만자로>의 쌍둥이 형제 해식과 해철(박신양)이 닮은 얼굴이지만 경찰과 건달이라는 다른 인생이 만든 회색지대이고 <무뢰한>에서 언더커버를 하는 재곤(김남길) 또한 거죽과 다른 회색이다. 작품의 열린 틈으로 감독 전작의 회색지대 인물들이 중첩되어 떠오른다. 수영(전도연)이 악착같이 돈을 받아 내려는 '이스턴 프로미스'라는 이름도 <폭력의 역사(2005)>로 잘 알려진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2007년 작 <이스턴 프라미스>가 떠 오르게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주인공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도 마피아 조직에서 언더커버하는 비밀 요원이라는 점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오승욱 감독은 과작의 감독이다. 2015년 <무뢰한>의 평단 찬사 이후 무려 9년만의 작품이다. 공들인 이야기 속에 감독의 지난 필모들이 서로 조응한다. (사진=CGV아트시네마)


영화학자 에드 시코브는 저서 '영화학개론'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다른 예술 매체의 특성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소설 문학에서 이야기 서사라는 스토리텔링을 뼈대로 하고, 연극에서 무대와 관객이라는 주요 요소의 장치를 두고 있으며, 회화와 사진처럼 특정 프레임 안에 시각적 표상으로 객체를 묘사한다. 여기서 진화한 영화라는 매체는 독특한 자신만의 특성을 갖게 되는데 이는 카메라의 다양한 움직임(Camera work)에서 기인한다. 이 움직임에 의한 미학적 장치를 동적 프레임(mobile framing)이라고 한다.


이 동적 프레임이 미장센이라 둔갑되기도 하고 상징과 복선을 대신하는 클리세라고 여기어지는 시각 주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시대에 있으면서 정작 콘텐츠 소비자들은 그 시각화의 미학 장치를 눈여겨보기는커녕 빨리 감기로 보는 세상이다. 이런 세태의 부작용은 이야기와 서사를 이해하는 독해의 능력 저하를 부를 뿐 아니라 만연하는 가짜에 속아 넘어가는 낭패를 유발한다. 결국 이야기에 집중하고 그 암시, 복선과 상징이 오롯이 인물의 대사에서 집중해 획득할 수 있는 작품 <리볼버>의 평점 수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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