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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오늘날 '좀비'에 '계엄령'일까?

[리뷰] 쿠팡플레이 시리즈 <뉴토피아>

by 박 스테파노
'물리지 않고 버티는 인간으로 남는 것이 좋을까?
좀비가 되는 것이 나을까?'


영화, 드라마나 웹툰, 소설 등의 좀비물을 접하다 보면 딜레마 아닌 딜레마 같은 물음이 솟아오른다. 분별과 사고를 망실한 좀비 떼를 피하고 도망 다녀 인간으로 버티는 일과 그냥 좀비에 물려 의식의 세계를 과거와 신의 손의 맡긴 채 원초적 욕구를 쫓아다니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지 판단하여 고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제3의 선택지, 인간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 존엄을 지키자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대부분의 좀비물에서 죽은 자(dead)들은 결국 좀비(undead)로 다시 소생하니, 이 또한 대안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양자택일의 심연에 빠지곤 한다.


코미디 좀비 호러물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 스틸컷 / 사진=유니버셜스튜디오


좀비물은 공포의, 두려움의 서사다. 시체들이 깨어나고, 좀비에게 물리면 다시 좀비가 되는 악순환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끔찍한 공포다. 개인적인 공포 호러물이 아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포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좀비물은 ‘재난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공포는 사회적 폭력의 서사를 뛰어넘어 극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주로

'아포칼립스'라는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공포'로 대변한다.


공포에 대한 경험과 포커스가 이전의 개인 공포에서 이러한 사회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는 증거가 ‘좀비물’의 창궐이다. 사회적 공포의 주류화는‘외부로부터의 공포’에서‘내부로부터의 공포’로 이동된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공포물은 외부에서의 침입과 습격, 또는 갑작스러운 발현에 있다. 외계 생명체, 드라큘라나 악령은 외부의 존재가 인간 내부로 스며드는 이질감의 공포다. 범죄자나 신원불명의 습격자가 개인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도 외부자로 인한 공포다. 이런 연유에서 내부의 방어자는 '우리'로 연대하여 극복의 서사를 이룬다.


내부로부터의 공포는 복잡하고 식별 난이하다. 좀비의 행동 양상으로 보아 우리의 편이 아닌 것은 틀림없으나, 사실 그 좀비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나의 가족, 동료, 이웃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과 사고가 거세되고 그저 물어뜯어먹는 욕망만 남은 존재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공포와 두려움은 증폭되고, 아직 좀비화가 되기 전의 나머지도 서로에 대한 인식이 늘 양가의 감정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 감정이 공포이자 깊은 슬픔이다.



좀비에, 계엄령까지 버무린 '뉴토피아'


국내 토종 OTT 쿠팡플레이가 새해 첫 오리지널 시리즈 <뉴토피아>를 내어 놓았다. 2월 7일 현재 1~2화만 공개되었으나 쿠팡플레이 서비스 사상 최고의 스트리밍 성적을 내었다고 한다. 2012년, 13년 전에 발표된 한상운의 소설 <인플루엔자>를 원작으로 하여 장르물 드라마로 선보였다.


쿠팡플레이가 좀비 코미디 <뉴토피아>를 독점 스트리밍하고 있다/ 출처=쿠팡뉴스룸


한국 사람들은 새해맞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연초 계획에 유난스럽다. 희망과 각오가 가득해야 할 이 시기에 연두 첫 작품이 좀비물이다. 거기에 더해 극 중 상황은 경비 계엄이고, 주 무대는 도심 방공포가 설치된 수방사 예하 부대다. 부대 마크를 뒤집어 놓았을 뿐 스스로 '수도 서울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는 부대'라고 설명하는 주인공 재윤(박정민)이 근무하는 부대는 누가 뭐래도 그냥 수방사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서울 초고층 건물에 배치된 방공포 부대는 자발적 고립의 상태가 최후의 마지노선이 되고 만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만든 소동에 더해 좀비가 창궐해 소란 가득해지는 이야기가 <뉴토피아>다. 이 추운 겨울에 좀비 이야기고, 이 엄중한 시국에 계엄이다. 비유나 상징을 떠 올릴 필요도 없이 직설 가득한 현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요즘 군대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 77층 초고층 빌딩 옥상에 주둔하는 방공포대는 낯설기만 하다. 계단을 통해 몇 층만 내려 서면 늘 파티 같은 행사가 가득한 VIP라운지고 그 밑에는 럭셔리 호텔이 자리 잡고 있으니 이들의 군생활이 좋은 것인지 반대로 가혹한 것인지 판별 불가하다. 이 판별 인식 불가능이 늘 조마조마한 대치이자 비상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늦은 군생활을 하는 재윤이나 그 여자 친구 공대여신 영주(지수)의 아슬아슬한 관계의 지속은 이별의 단절보다 벅차기만 하다. 재윤의 마음이 부대 밖을 헤맬 때마다 군대 생활에서의 고문관 낙인은 늘어만 가니 이 또한 재윤의 과거와 오늘의 대치 상황이다. 아슬아슬한 대치는 뜻밖의 재난으로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서울 초고층 빌딩 옥상 위 방공포대에 복무하는 군인들이 좀비들을 막딱들여 사투를 벌인다. / 사진=쿠팡플레이


좀비가 창궐하여 아직 좀비화되지 않은 이들을 사냥하면서 세상은 대혼란에 빠진다. 여기에서 '경비 계엄'의 상황이 시작되며 어제까지 지켜내야 했던 빌딩의 방문객, 서울의 시민들이 잠재적 적으로 변모하고 만다. 내부로부터의 위협이란 이런 재앙과 같은 재난의 상황을 말하며, 계엄의 필요 요건이 되는 것이다. 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고라는 농담 같은 이유가 아니라는 말이다.


극 중 방공포대장 중위가 경험 많은 부사관에게 전투 경험이 있냐고 묻자, 해외 파병 때 경험해 보았다고 대답한다. 중위가 곧바로 계엄은 경험이 있냐고 묻는다. 부사관이 대답한다. "계엄은 처음입니다." 전쟁보다 확률이 적은 재난 상황이 21세기 세계 10대 경제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재난이자 재앙이다.


23년 말에 촬영 시작하여 24년 여름에 후반 작업을 마친 <뉴토피아>는 반년이나 묵힌 뒤 스트리밍하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작년 여름부터 정국이 급속도로 얼어붙어 작은 비유조차 과잉 해석으로 매도되기 쉬운 환경이 주저의 빌미가 되었을 것이다. 자칫 음모론으로 치부되어 작품 본연의 평가가 어려웠을 것이고, 공포물 성수기 여름을 보내고 공개 시기를 가늠하다가 계엄 내란 사태를 맞이해 이 추운 겨울에 선 보이지 않았나 싶다.



좀비물은 우경화 시대의 징표


영화에 대해 분석하는 것들 중, 가장 흥미로운 그래프가 있다. 바로 좀비 영화 대 흡혈귀 영화의 인기를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원이었는지 민주당원이었는지에 따라 구분한다.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화당이 집권할 때는 좀비들이 대세이고, 민주당 집권시기에는 뱀파이어에 대한 것들이 집중 조명받는다.


보수를 좀비로 진보를 뱀파이어로 대의시켜 정치적 비판세력이 영화관을 점령한다는 의미다. 공화당 집권기에는 좀비를 호출해 경고하고, 반대로 민주당 집권 시에는 뱀파이어의 공포를 호출한다는 이야기다. 정설은 아니지만 제법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여러 사례들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영화계에서 정권의 좌우에 따라 벰파이어물과 좀비물은 교차해 성행한다. /출처=marcienceshow

닉슨 대통령(공화당) 시대에 그 유영한 좀비 영화 <살아 있는 시체의 밤(1968, Night of the Living Dead)>은 영화관마다 휘청대는 좀비들로 뒤덮었다. 카터 대통령(민주당) 때에는 드라큘라 영화 두 편이 각색되었다. 1980년대의 거대한 빨간 스파이크(돌연변이 바이러스-코로나 같은)는 그때 보수적인 슈퍼히어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리메이크작과 속편, 두 편의 <돌아온 시체들의 밤> 시리즈 영화, 그리고 리애니메이터(일종의 프랑켄슈타인 류의 영화)가 영화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 당선은 대중들에게 앤 라이스(<뱀파이어의 연대기> 저자)을 선사했다.


영화사회학에서는 아직까지 이 연관성에 대하여 논문이 쓰이고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관성은 얼토당토 한 유추는 아니고, 오히려 완벽하게 말이 된다는 생각이다. 공포는 시대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1차 감정이다. 이념에 대한 판단과 추종을 떠나 좌파든 우파든 두려워하는 감정은 동일하다. 하지만 2차적으로 드는 감정은 사회적인 학습에 의해 작동한다. 그래서 두려움을 더 느끼는 대상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일 수 있다.


<뉴토피아>의 제작진들이 이런 정치적 함의를 정밀 계산해서 작품을 선보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계엄 내란이라는 상상 밖의 재앙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고, 지금의 극단적 우경화의 징조가 내부로부터의 위협이라는 좀비들을 연상시키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우파vs좌파, 좀비vs뱀파이어 / 사진=cracked.com


극우가 만든 좀비에 대한 일종의 경고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물부터 몬스터가 등장하는 공포물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공포로 작용한다. 평온한 사회를 위협하는 것은 ‘공산주의’나 ‘테러리스트’ 같은 외부의 공포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좀비는 죽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시작된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내 옆의 가족과 이웃이 좀비가 될 수도 있다. 부로부터의 위협이 더 공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아 식별의 혼란이 온다.


내 가족이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은 좀비가 되면 어떠한 대화도 가능해지지 않게 된다. 대화가 불가능한 비이성적 비감성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아무런 교감도 없이 살아 있는 사람의 살점만을 탐욕하는 잔인한 좀비들은 어떤 무엇으로 막아 내기 힘들다. 십자가나 은총알, 마늘도 소용없고 독실한 퇴마 사제의 기도도 소용없으며, 머리를 조준하지 않는 한 인간의 무기도 무용지물일 뿐이다. 막 다른 곳에 몰리면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좀비가 되던지 자신의 머리통을 스스로 날려 버리던지.


영화 <부산행>은 박근혜 정권 중반 촬영되어 그 말기인 2016년 5월 개봉되었다./ 사진=넥서스엔터테인먼트


좀비물의 서사는 특유의 플롯과 클리세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영화 <부산행>을 떠 올려 보자. 좀비물의 전형적인 코드들을 담고 있다. 각자의 삶의 모습으로 다양한 군상으로 기차에 오르는이 들이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고 감염자가 생기면서 이들의 목적은 단순하게 이분되어 버린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자를 물어뜯거나, 감염된 좀비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서 안전한 피난처로 도달하는 것,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어떠한 욕구도 개입하기 어렵다.


각자의 삶의 모습을 살짝살짝 보여 주면서 다양한 군상들이 결국은 이 본능적인 모습으로 귀결된다고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다. 부산행 KTX에 탄 사람들은 처음에 부산으로 향하는 목적은 다양하였을 것이다. 딸의 생일을 위해 사이좋지 않은 아내에게 찾아가는 사람부터, 출산을 위해 고향을 가는 사람, 모처럼 휴식을 위해 여행을 가고 사업을 위해 출장을 가는 사람들로 다양하게 기차 안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좀비와의 사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이들에게 이전의 목적은 소멸되어 버린다. 그저 생존하거나 생리적으로 욕구를 채우거나 두 가지의 이유만 남게 된다. 그들이 가는 곳이 부산이던 대전이던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왜 지금 좀비일까?


극단적 우파가 나타내는 위협의 일부는 순응에 대한 집단 집착이다. 가장 단순한 고정관념으로 요약하면, 보수주의자들은 빨간 넥타이를 맨 어두운 정장을 입고, 진보주의자들은 거칠고 언밸런스한 넥타이와 드레스를 입은 히피들이다. 보수와 종교를 결부시키는 것도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애국심이라고 보는 것도 그 한 가지다.


하지만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해서라도 보수주의의 일부는 안정과 전통을 온 힘을 다해 고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좀비 종말론은 그들에게 완벽하고 안정된 사회의 궁극적인 비전일지도 모른다. 좀비들은 사회개혁을 시도하거나 헌법 개정을 시도하지 않고 그저 어슬렁거리고 신음하며 무언가에 부딪힐 뿐이니까.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체포영장 집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2025.1.3, 뉴스1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기독'이 '그리스도'의 한자식 음차임을 볼 때부터 뻔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종교의 핵심은 죽음에서 살아나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시작한 한 남자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각해 보면 좀비는 종교에 대한 전형적인 비종교적 비판이다.


좀비는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고 묻지 마 식의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기독교 진영에 대한 풍자다. 당신의 집 문 앞에 와서 초인종 눌러 성경 말씀 전하는 극렬한 복음주의자들 말이다. 그리고 광장에 알 박기로 예배인지 집회인지

모를 태극기와 성조기를 쌍으로 흔드는 이들 말이다.


좌우의 구분은 불편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금의 극한 대립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필요한 요소임도 합당해 보인다. 단, 어느 낡은 개념서에서 외우듯 정리한 것들은 자칫 편협한 확증편향에 가두어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한민국은 극단의 대립 현상으로 재난 가운데 있다.


정치를 대할 때 비상식이 가장 무서운 개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터무니없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비상식적인 것들의 관점은 어떻게든 전염성이 있다. 만약 그것에 노출된다면 우리가 좋든 싫든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것은 뱀파이어도 좀비도 한번 변하고 나면 고칠 수 없다. 한번 바꾸어 회귀한 화신자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물리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파괴'뿐이다.


<뉴토피아>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세상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자체가 공포일지도 모른다. / 사진=쿠팡플레이


좀비물’은 20세기가 되어서 만들어 낸 최신의 현대 주류 장르라 할 수 있다. 하드고어적인 식육의 작면이나 구토와 오심을 유발하는 좀비들의 외모, 그리고 지각과 감정이라고는 없이 그저 단순한 욕구에 의해 이리저리 ‘떼’를 지어 다니는 좀비들의 모습으로 장르적인 메시지 전달의 주된 방법은 ‘풍자’ 일 것이다. 인간을 풍자하고 그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와 세상을 풍자하며, 그것을 목도하는 제3인척 하는 관객들의 이중적인 생각들을 풍자하는 것이다.


<뉴토피아>의 이야기는 코미디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내장이 튀어나오고 신체가 분리되며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면이 가득한 하드 고어물이지만 진행되는 소동은 어처구니없는 허무한 개그 콘서트다. 풍자의 미학으로 코미디만 한 것이 없지만, 이 어이없는 상황이 이제 현실같이 느껴진다. 코미디 같은 비극이 지금 대한민국의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심리적 계엄의 연속이다. 풍자물로 지금을 직시하고 다시 새롭게 일어 설 준비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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