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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를 생각하지 마?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재난이야기다

[리뷰] 넷플릭스 시리즈 <제로데이>

by 박 스테파노

현대 전쟁의 양상은 다양하게 파편화되어 있다. 그 파편화는 더 넓고 깊게 확장 중이다. 서로 볼장 다 봤다는 식의 대량 화력 투여의 전면전은 1990년대 걸프전 이후로 보기 힘들어졌다. 전쟁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후과의 계산표가 바로바로 집계되는 요즘 세상에서 효과를 장담할 수 없는 구시대식의 전면전은 주저의 대상이 되다. 이런 이유에서 전쟁은 보다 작게 나누어진 국지의 분쟁으로, 그보다 더 잘게 파편화된 테러의 모습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형태적 양상은 더 잘게 나뉜 그러데이션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 폭탄 테러, 하이제킹, 생물학적 공격, 전기 그리드 장애 테러, 전산 장애 공격 등로.


넷플릭스 시리즈 <제로데이>는 파편화된 일종의 '전쟁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미국 전역을 마비시킨 멀웨어 공격의 토털 시스템 셧다운이 중심에 있지만 드라마는 다른 양상의 복합적인 또 다른 전쟁들을 나열한다. 일례로 전직 대통령이자 '제로데이'로 명명된 사이버 테러의 진상규명 위원장인 조지 멀린(로버트 드니로)이 겪는 뇌기능 이상도 최신 신경무기의 공격에 노출된 탓라 의심게 만든다. 더 복잡한 양상의 전쟁들은 사고가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로 나타난다. 테러의 두려움에 노출된 사람들은 가짜 뉴스 같은 파상적 심리전 습격에도 맞서야 한다. 이로 인한 부수적인 폭력은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위협, 혐오와 차별이라는 물리적 형태가 만연해진다. 물리적 폭력도 감당 어렵지만, 재난 상황에서 권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에는 누구나 속수무책이 된다. 계엄 같은 권력의 폭력 말이다.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Žižek)의 '구조적 폭력' 개념은 전통적인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시스템 내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폭력은 직접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개인과 집단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불평등과 고통을 초래한다. 그 고통의 해소는 해결이나 치유가 아닌 전이와 전가로 이어진다. 원인을 찾고 진실을 규명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보다 지목하고 색출하여 책임을 전가하고 고통을 전이하는 것이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전이된 고통으로 내 고통이 덜어지거나 치유되지 않음에도 근거 없는 민간 치료법 같이 그저 심인성의 고통 감소를 노릴 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제로데이>, 전 대통렴 조지 멀린(로버트 드니로)이 인명사고의 현장에서 단합과 응원의 메세지를 내 보내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제로데이>는 이런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전형을 보여 준다. 폭력을 마주한 상황에서 잘 훈련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고 정지를 경험할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마주하는 극한의 상황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한 사회적 재난이다. 드라마는 이 재난이 파생하는 모습과 대처의 허둥대는 권력 기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재난의 속살을 보여주고 진실의 끄트머리라도 잡을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함으로써 각자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응답할 여력을 부여함에 재난 서사의 의미가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며 국내외 정치 상황에 빗대어 신자유주의 침습과 계엄 내란의 시국에 한 정치적 주석으로 꿰맞추기 십상이다. 난의 상황을 정치적 위기로 해석하는 일은 오래된 헛발질이다. 처칠도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며 재난의 정치를 즐겨 삼았다. 정치 뒤편에는 공포의 공갈로 돈을 벌려는 천박한 기술권력이 똬리를 트는 시대를 살고 있다. 드라마 내내 조지 멀린의 머리를 침습하는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Who killed Bambi?'가 예표하듯 이야기와 사건들을 정치의 언어로만 해석하다가는 확신의 부조리에 다시 빠져들고 만다. 이 이야기는 정치가 아니라 재난 서사이기 때문이다.



누가 밤비를 죽였을까?


넷플릭스의 <제로데이>는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시대의 공통된 취약성을 보여준다. 세상의 편의는 때론 족쇄가 되곤 하는데, 고도 자본사회와 디지털 시대의 인류의 최대 취약성은 시스템의 셧다운이다. 디지털 초연결 사회가 만든 맹점은 보안과 장애의 취약성에 있다. 디지털 데이터와 디지털 자본은 주고받을수록 그 가치는 배가 되지만, 반면에 반대급부도 동일하게 가속한다. 바로 유출과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는 데에 있다. 이는 신자본주의에 대한 경고와 동일하다. 금융공학적 자본의 확장은 시계열 이상으로 능가하지만 반대로 위기와 위험도도 그만큼 증가한다는 맹점을 잉태한다.


드라마에서 조지 멀린은 환청과 일시적 기억 상실 등 일종의 신경증 증상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치매와 같은 신경정신학적 병증이 있을 수도 있고, 극 중 음모처럼 그의 뇌기능을 정밀 타격하는 신경 무기의 피습일 수도 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음모이든 간에 한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대 결정의 권한을 가진 그에게는 그 자체로 위기 덩어리다. 그가 환청으로 듣는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Who Killed Bambi?'라는 곡은 이러한 국면에서 다분히 다성악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Sex pistols의 'Who killed bambi?'의 프로모션 포스터. 1979. OmegaAuction


이 곡의 제목은 디즈니의 클래식 캐릭터인 밤비의 죽음을 암시하며, 이는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의 상실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순수의 시대는 가고 없어진 세태를 비평했다는 의미에서 드라마의 여러 상황을 대입해 볼 수 있다. 디지털 재난을 극복하는 솔루션으로 고전적인 아날로그 방법론(전력-통신의 매뉴얼 복구, 단파 송수신 통신 장치 등)이 대두되는데 이는 순수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치적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해득실의 계산보다 공동선을 추구하던 시대의 순수함이 호출된다. 토론과 합의가 사라지고 극단의 주장과 힘겨루기만 남은 파국을 비판한다고도 수 있다.


영미권의 대중음악, 그중 록음악에 조예가 있다면 'Who killed Bambi?'의 원곡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에 주목해 볼 수도 있다. 펑크 락 밴드의 선도 주자인 섹스 피스톨즈는 아마추어리즘이 가득한 편곡과 연주로 주류 프로의 세계를 흔들어 대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외피적인 평가에 그칠지도 모른다. 가장 중요한 면을 누락시키거나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제법 심오하다. 이들의 앨범은 정치적, 사회적 이념과 신념은 물론 미학적이고 음악적인 이론가들의 기존 채점표로부터도 이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음악은 소위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포장된 신념’으로부터 관계를 설정하기 난해하다. 아니 오히려 무관심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탈신념'의 음악이 이들의 얼굴이었다.


영국의 펑크 락 내표주자 Sex pistols. Wikipedia


지제크의 구조적 폭력 관점에서 'Who Killed Bambi?'는 현대 사회에서의 순수함과 진실의 상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곡은 사회 시스템 내에서의 보이지 않는 폭력—예를 들어, 정보의 조작, 개인 프라이버시의 침해, 그리고 디지털 감시—이 어떻게 개인의 자유와 순수함을 파훼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 신념과 이념으로 포장된 오해와 오류는 이미 부차적인 시대가 되었고 신자본주의와 그 추종자들의 입맛에 맞는 틀로 구조화하는 일은 순수와 진실을 박해하기 마련이다.


<제로데이>에서 이 곡은 아마도 디지털 시대의 어두운 면—사이버 공격, 데이터 유출, 그리고 기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강조하며,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현대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암시해 준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더 깊고 복잡한 사회적, 기술적 시스템에 의해 초래되는 폭력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Who Killed Bambi?'는 현대 사회에서의 구조적 폭력과 그로 인한 순수함의 상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암시하며, <제로데이>는 이러한 주제를 디지털 시대의 맥락에서 탐구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재난은 서로 연결된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재난과 영화>에서 재난이란 과거와 미래가 모두 잘려나가고 순수한 현재라는 시간성만이 내 앞에 존재하는 상태라 설명한다. 현재성만 남은 재난과 또 다른 재난은 서로 이어져 발생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굴곡을 본다 하더라도 쉽게 납득이 간다. 조선의 패망과 일제의 침탈, 남북의 분단과 한국전쟁, 연이은 독재와 군부의 쿠데타, 그리고 그 속의 4.3과 5.18, 민주화 이후 산업의 고도화에 미칠 수 없었던 사회구조와 의식의 미비가 낳은 여러 재난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메르스와 코로나 팬데믹, 그리고 양극화와 구조적 불평등. 계엄 내란과 폭동.


역사의 통시적 흐름을 보더라도 토인비 식의 도전과 응전은 인간 개인에게 가해진 구조적 재난의 압력과 버팀의 연속이었다. 하나의 사고가 사건이 되면서 어쩔 수 없는 연쇄적 스트레스들이 또 다른 재난으로 개인에게 닥치곤 하였다. 신자유주의가 몰아치는 폭풍의 압력은 상상 그 이상이어서 40년 이상 대다수가 휘청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재난이 가져오는 최대 여파는 바로 '계획의 상실'이다. 재난 상황에서 계획은 쓸모없는 생각의 조각일 뿐이다. 계획이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두려움의 트라우마뿐이다.


재난은 또 다른 재난과 이어진다. 그 뒤의 누군가는 위기를 기회 삼아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극중 극우 방송인 에반 그린(좌)과 하원의장 드와이어(우). 넷플릭스


언제 다시 재난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집단적 트라우마는 실수를 낳곤 한다. <제로데이>는 사이버 멀웨어 공격 후 28일간의 수습과 혼란의 어딘가를 배경 삼고 있다. 제로데이 공격은 보통 위협이 시작된 시점과 공격을 방어, 해체할 패치를 내어 놓는 시점 사이의 '무방비 시간대'가 존재한다. 이 시간은 계획보다 수습이, 수습보다 책임 규명이 더 강하게 요구되는 정치적 시간이다. 2006년의 트로이목마 공격 시 시뮬레이션한 무방비 시간대는 최대 대략 28일이었다.


무방비 시간대는 새롭고 부차적인 공격과 위협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시간이다. 이 두려움에 재난을 부러 자초한 욕망이 결합하여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양산한다. 이 트라우마가 낳은 실수는 '지니를 호리병에 다시 넣을 수 없는 일'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만들기도 한다. 책임을 몰아 추궁할 존재를 만들고 공갈과 엄포로 트라우마를 증폭시켜 대중의 사고를 무방비로 만들어 버린다. 진실은 중요치 않고 그저 사실을 나열하여 그 사실에 마뜩한 희생양을 만들기 일쑤다. 또 재난이 된다. 재난은 이처럼 연쇄적 작용으로 일어난다.


재난의 서사는 이 지점에 물음을 던지는 이야기다. 지금 누가 밤비를 죽였는지를 묻기보다 밤비는 다시 살릴 수 있는지, 밤비의 가족과 그 영혼의 슬픔은 어찌 어루만져야 하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계획이 소멸되고 책임이 모호해진 재난을 마주하는 일은 정치만으로 부족하다. 재난은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재난을 그리는 서사에서 원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연이 주는 재난의 원인은 자연 그 자체다. 인간의 욕심이나 지구 환경 침해의 문제가 된다면 이는 사회재난에 가까워진다. 이런 종류의 재난에 팬데믹, 테러, 전쟁에 이르는 사회적 재난은 사고를 넘어 사건이 된다. 사건의 발생, 진실의 탐구, 그리고 응답이라는 오래된 서사의 구조가 유효하게 작동한다. 정치적, 정무적 판단이 아닌 진실을 들여다볼 상식의 작용, 용기의 작동이 필요하다.


<제로데이> 마지막장면 '제로데이 위원회'의 의회보고. 조지 멀린은 적당한 정무적 사실조사가 아닌 진실의 규명이라는 정면돌파를 선택한다. 하나 남은 딸이 감옥에 가더라도. 넷플릭스



욕망의 재난에서 서로를 꺼내 주어야 할 때


현대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재난의 동인은 욕망이다. 넷플릭스 <제로데이>에서 벌어지는 주된 재난과 그로 파생된 연결된 사건의 연속은 욕망이 작동해서 일어난다. 전국의 전산망과 시스템을 셧다운 한 이유가 정치적 목적에서 잠시 겁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자백에서 '지금 우리'에게 재현되는 사회적 재난을 떠 올리기 충분하다. 안타까운 일은 계엄 내란과 그 준동이라는 재난 가운데에 놓인 피해자들, 즉 주권을 침탈당하고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치유는 요원해 보인다는 점이다.


모든 독재자들의 자유와 주권 억압은 늘 일시적이라 말하지만 결국 무덤과 폐허만 남을 뿐이다. 재난의 극복은 이러한 폐허에서 서로를 꺼내주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한다. 그 시작은 재난을 정확히 바라보는 태도를 갖는 일이다. 사실의 총합이 진실이 될 수 없듯이, 뉴스의 모음이 진실 규명의 길라잡이가 될 수 없는 법이다. 오히려 이럴 때는 유사한 소재의 재난 서사를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영화학자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물질세계의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현상을 포착하고 증명함으로써, 그것이 일상 속에서 무심히 잊히고 침묵당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일이 영화의 기능'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재난 서사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그 속에 담긴 진짜 응답의 길을 찾는 노력은 늘 유효하다.


대한민국 주요 재난사. 사진 콜라쥬=위클리 중앙


<제로데이>는 마치 지금의 우리를 예언한 묵시록 같이 받아들여진다. 드라마 속 주인공 조지 멀린은 '별을 보면 별자리를 찾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나, 평소의 관심만으로 특별한 노력 없이 관련된 서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서사는 지어낸 이야기의 한계를 벗어나 현재 하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도출해 주곤 한다. 드라마를 보고 '지금 내란과 유사하네'라는 단편적 정치 해석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모든 재난 뒤의 폐허와 무덤엔 늘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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