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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악이란 없다. 진부한 변명일 뿐

[리뷰]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by 박 스테파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눈보다 귀를 열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시작 화면부터 스트리밍 오류가 난 것이 아닌지 살펴보게 만든다. 묘한 소음들에 암전 화면은 평범한 관람자의 인내 한계를 웃돈다. 온갖 소음과 사고, 시위 현장음을 배음해 만들었다는 오프닝과 클로징 음향은 소름이 오를 만큼 서늘하다. 거기에 더해 영화 내내 비명과 총성, 기괴한 파열음과 발화음이 깔린다.


귀로 들리는 소름 돋는 음향에 반해 화면은 밝고 포근하기까지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의 관사는 공들인 보금자리 티가 나고, 다둥이들에 도우미들 까지 꾸린 가정에 더할 것이라곤 없어 보인다. 아우슈비츠는 그들에게 작은 왕국에 다름없고 회스의 아내 헤트비히(산드라 휠러)는 스스로 '아우슈비츠의 왕비'라 칭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정성 들여 꽃과 채소를 가꾸고 아이들을 키우는 관사 옆은 역사적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인데도 말이다. 높은 담장 안의 비명과 시커먼 연기, 악취가 가득인데도 말이다.


휠러의 화원은 따사롭고 포근하기 까지 하다. 바로 옆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인데도 말이다. (사진=TCO(주)더콘텐츠온)


악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이 영화의 평을 보면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넘친다.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의 유명세만큼 잘 알려진 수사다. 이 말을 거들어 한나 아렌트의 글을 손바닥만큼이라도 읽은 척하기 십상이다. 영어로 'banality of evil'에 대한 표현의 번역이 자초한 일이다. banal이라는 표현은 오히려 평범의 반대편에 있는 양태를 이야기한다고 한나 아렌트는 후에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최초 번역자의 고민이 있겠지만 banal을 평범으로 고착화한 후과는 적지 않아 보인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표현인 banality of evil을 이해하려면 책 전체, 적어도 앞뒤의 문장 맥락의 파악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런저런 표현을 타고 잘못 알려진 것은 평범한 사람 누구나 악인의 면모가 있다는 해석이다. 그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평범한 공무원도 역사와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말처럼 퍼진 말은 가짜 해석이다. 이 말은 자칫 악행에 대한 원초적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교부주의적 기독교식 해석에 머물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이 말을 쓰기 전에 아이히만의 마지막 변론을 강조하며 이야기 전한다. 아주 일반적인 장례식에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과 단어들의 나열이 악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수 백만을 죽인 장본인이 죄를 추궁당하자 희생당한 고인들에게 상투적인 장례 용어로 표현하는 아이히만에게 더 이상 보탤 말과 사유는 필요치 않았다. 이처럼 악이라는 것은 권력과 대세에 기대어 사유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악의 무지성, 무사유'를 지적하는 말이다.


한나 아렌트의 banality of evil 의 근원은 '무사유'에 있다. (사진=@Little_tiny_)


좀 더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라영의 <폭력의 진부함>의 한 대목을 거들어 본다. 길 위에서나 구걸하거나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을 못 본 체하거나 무시하듯 뿌리치는 행동에 죄책감을 갖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에게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스스로 그래도 되는 권력을 받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무시하고 그 사람을 투명한 사람으로 여기며 통과해도 비난받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라영은 이 평범한 권력이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말한다.


이것은 구조적 폭력이자 악행의 방증이다. 구조라는 것이 사회제도나 문화적 규범 같은 것만 있지 않다. 너와 내가 구조고 우리와 그들이 구조의 일부다. 악은 이 구조 틈틈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이 악의 무사유적 특징이다. 딱히 거들 말과 사유가 필요 없이 타인이 보내는 고통의 호소를 무시할 수 있는 벽을 세우는 존재가 악이다. 악은 이처럼 사유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습성에 길들여 있다. 이 습성을 쉬운 말로 '모름'이라 한다.



모르는 게 악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일본에서는 '악의 진부함'으로 번역했다. 국내 역자는 '진부하다'라는 말의 협의에 대한 우려로 '평범성'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진부함이 더 이해 수월하다. 진(陳)은 '늘어놓다, 진열하다'의 뜻이고 부(腐)는 '낡다. 썩다'의 의미한다. 케케묵은 말을 하거나 뻔하고 식상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하는 말이다.


진부(陳腐)는 썩은 고기를 자랑하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은 과시가 고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줄로 착각한 자랑삼던 고기가 좋은 상태에서 시일이 경과하여 썩은 것이 되고, 악취를 풍기게 되었다. 자신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선한 고기가 썩은 것이 되어 더럽고 추악한 것이 되었다. 썩은 고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만다. 진부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진부함의 밑바닥에는 '모름'이 있다.


고경하 자전적 소설 <타인의 고통은 진부하다> (사진=교보문고)


'모른다'는 양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공부와 학습이 없거나 정보나 지식이 부재한 경우가 하나다. 나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아 모르는 경우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소극성을 넘어 알기를 거부하거나 차단하는 상태가 문제다. 거부하고 차단하는 일은 알아야 하는 상대의 무기력을 야기한다. 말로 설득할 수 없고 사유와 사고를 촉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모름은 수많은 어제의 묵살을 딛고 만들어진 결과'라고 이라영은 <폭력의 진부함>에서 말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악행 일삼은 추악한 권력의 '몰랐다'를 반복해 듣고 있다. 내란과 외환의 커다란 폭력을 휘두르고서 '차마 몰랐다'라고 대답하는 제복의 장군들을 보며 악의 진부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 극악한 범죄의 우두머리는 어떤가? 국민들에게 잠시 경고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느니, 이런 일은 고유의 통치행위라니 박수를 안 쳐서 모든 선거를 의심했다는 진부한 변명만 가득이다. 참신한 의도 한 자락 없이 십 수년이 된 수구들의 진부한 상투적 표현이 악행의 근원이 된 셈이다. 이처럼 거악은 촘촘한 계획과 설계 없이 그저 세상과의 공감을 묵살한 차단과 거부의 발화일 뿐이다.


내란 혐의자들 (사진=한국일보)


악은 진부하지만 고통은 날마다 새롭다


영화 <더 리더>의 한나(케이트 윈슬렛)는 수용소의 화재 시 그들을 감금한 채 죽게 만든 것에 대해 '그것이 나의 직무'라 말하며 항변했다. 그녀가 아무리 수용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문맹의 한계로 정보 취득의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직무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이 면죄부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처럼 무사유, 무사고로 인한 인지 부재는 죄악이다.


영화 <더 리더>에서 한나의 전범 재판. 그녀의 무죄 변론 요지는 '무지'다 (사진=와인스타인 컴퍼니)


악이 대는 핑계는 쉽게 무너질 무덤이다. 헌법과 법률을 잘 몰라서, 선거의 부정 증거가 있을지도 몰라서, 지금이 어떻게 이루어 놓은 사회인지 몰라서 쉽게 행한 악행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모른다는 이유 자체가 스스로 거악임을 자인하는 일이다. 나를 둘러싼 타인, 세상과의 소통과 공감의 부재는 부작위일지언정 묵살이자 차단이 된다. 그 묵살이 모름을 만들고 결국 모름이 악을 잉태한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휠러 가족만 모르는 것들이 있다. 딸의 성공을 보러 온 휠러의 장모는 며칠 밤을 보내지 못하고 야반도주한다. 밤에도 활활 타오르는 수용소 내 굴뚝을 보며 근심 깊은 모습 뒤에 사라진다. 전쟁 전 일하던 유태인 부인이 저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이뿐 아니라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인근 폴란드 주민들은 야밤 소각 냄새에 인상을 구기고 코를 킁킁대며 창문을 닫는다. 수용소 담장에 바로 붙은 휠러의 사택만 피해 갈 리가 없는데도 그들의 일상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휠러의 가족에게 이곳은 왕국이다. (사진=TCO(주)더콘텐츠온)


이들의 고민이라고는 아우슈비츠를 떠나 전출 가는 일뿐이다. 이 또한 가족은 그들이 일군 아우슈비츠 왕국에 남음으로써 해소해 버린다. 유태인 부호들에게 압수한 족제비 모피코트를 이리저리 재며 수선할 고민과 유해가 흘러나오는 샛강에 아이들이 오염되지 않게 노력하는 일이 고민이라면 고민일 뿐이다. 듣기 괴로울 만큼 가득 차 있는 비명과 절규, 죽음의 냄새는 흔한 백색 소음일 뿐이다.


지난번 소개한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말을 다시 호출해 본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고통은 진부하기는커녕 날마다 새로운 법이다. 들은 최선을 다해, 아니 최선을 초과해 몸부림치며 아우성대고 비명 지르고 있다. 이 사방 외부의 고통에 대해 당신은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을까. 이 또한 식상하고 진부한 백색 소음이라 여기며 모른 체하는 것을 당연 권리로 삼고 있지는 않는가. 내 수많은 오늘의 묵살이 내일의 모름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게 악은 진부하지만 집요하게 핑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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