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스 플랜>의 매기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에 대처하는 법
‘계획적인 사람’과 ‘계획 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혀 다르다. 미래를 떠올리고 상상하는 것과 실행에 옮겨 구체화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으며, 무엇보다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때로는 불합리하기 그지없어 보이는―변수들로 가득하기에, 계획적인 사람이라면 착오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나마 통제 가능한 내부 변수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모든 계획의 중심에 둘 것이 분명하다. 어디까지나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전제가 붙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매기스 플랜>(2016, 레베카 밀러)의 매기는 ‘계획 짜기를 좋아하는 사람’ 쪽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어디론가 바삐 가다가도 (사실 영화 내내 매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길을 헤매는 노인을 지나치지 못하고 안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관객은 진한 ‘오지랖’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 오지랖이 이후 벌어질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된다. 통제 불가능한 외부 변인들을 대거 끌어들이면서 그녀의 계획은 급격히 틀어져버리는 것이다. 애초에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꼼꼼히 따져가며 계획을 짜던 매기가 도저히 계산에 맞지 않는 허술한 결정을 내리게 된 가장 주된 원인은 물론 (그놈의) 사랑이었을 테지만, 영화는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으며 철저히 매기의 계획이 ‘망한’ 이후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매기스 플랜>은 우리 모두가 종종 그러하듯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혹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계획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엉뚱하게 흘러갈 때 이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한 편의 우화로 유쾌하게 풀어낸다.
책임감 강하고 남달리 이타적인 자신의 천성을 일찌감치 파악한 듯, 예술가의 작업을 시장에 소개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직업으로 택한 매기는 서른 즈음에 자신이 남자와 진득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낮다는 결론 또한 신속하게 내린 뒤 “오십 직전 절박해진 시점이 아니라 지금 내 의지로” 원하는 가족(정확히는 아기)을 얻기 위해 미래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한 남자가 끼어들면서 그녀가 생각한 미래에는 망조가 들기 시작한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아내와 도무지 못 살겠다던 존은 결혼하고 나서 보니 그냥 자기중심적인 남자였고, 그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소설에 매달리느라 매기는 경제활동은 물론이고 가사와 육아도 독박을 쓰게 된 상황. 게다가 존이 헐뜯던 전처 조젯은 알고 보니 지적 매력이 넘치는 멋진 여성이었으며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매기가 끼어들 수 없는 특별한 뭔가가 아직 있는 것 같기까지...!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안 매기는, 그러나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외치며 주저앉는 대신 역시나 씩씩하게 두 번째 계획에 바로 착수한다.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그녀가 세운 두 번째 계획은 바로 가정을 꾸리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짐이 되어버린 존을 조젯에게 다시 반납하는 것이었으니. 이 대담한 계획을 들은 조젯은 처음에는 “인생이 그렇게 상자에 넣었다 다시 빼는 것처럼 간단한 줄 아냐”며 기막혀 하지만 이내 매기의 순수한 의도에 설득되어 쿨하게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영화는 온갖 변수들의 작용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우주의 원리’에 따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가쁜 호흡으로 그려낸다. 일련의 사건들은 꽤나 유쾌하게 진행되는데, 이는 매기를 포함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모두 사랑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의 삶까지 짊어지고 챙기려 드는 매기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을 뺏어간 젊은 여자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할 줄 아는 도량 넓은 조젯,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하기 그지없지만 뻔뻔할 정도로 솔직하고 앞뒤가 같아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존, 그리고 극중 비중은 낮지만 강렬한 매력을 내뿜는 털북숭이 순수 가이, 피클맨까지!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각자의 욕망에 충실한 이들은 성인이지만 전혀 어른스럽지 않고, 철없다 싶을 만큼 꿍꿍이 없이 천진하다. 네 캐릭터 모두 매력적이지만 다소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들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법한 실수와 실패 이후에 이를 후회하고 과거에 연연하는 모습이 간편히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매기가 대사처럼 현실의 우리는 때론 “자신으로 사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계속 망하고…… 그런 지질한 실패의 역사를 계속해서 곱씹으며 뒤돌아보는 미련한 존재이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인생이 당최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나를 포함해) 누군가에 대해 결코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인지 모른다. 선량한 매기인들 자기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고, 어디서부턴 도무지 참을 수 없는지를 머릿속으로 계획만 짰을 땐 어찌 알았겠는가? 존만 해도 조젯과의 결혼에선 자기가 장미를 돌보는 정원사라며 툴툴대더니만 두 번째 결혼에선 매기에게 정원을 죄다 맡겨버리고 자기가 장미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게다가 자기가 어딘가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막다른 골목 끝까지 가본 다음이 아니고서야―이를테면 500페이지 넘게 소설을 써보고―혹은, 그러고 나서도 알 수 없다. 똑똑하고 예민한 조젯 역시 자기를 배신하고 떠나버린 무책임한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결국 <매기스 플랜>은 필요 이상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던 한 여자가 세상을 온통 채우고 있는 삶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겸허히,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래서 그녀가 이제 진정 남의 인생에 관심을 끄고 불교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글쎄.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는 쪽에 500원 걸겠다.**
*바로 이 부분에서 스크루볼 코미디가 종종 그렇듯 관계의 전형적인 문법을 깨트리며 결성되는 두 여성의 연맹은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관객을 흐뭇하게 만든다. 차라리 존 자체를 두 사람의 인생에서 빼버리고 두 여자가 분담하여 아이들을 키우며 꾸려가는 가정이 훨씬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 나만 했을까?
**“같다”라는 표현이 언어적 콘돔이라던 존의 주장을 차용해, 영화를 본 사람만 웃을 수 있는 작은 농담을 넣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