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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 yang Feb 18. 2019

현대판 <소공녀> 미소, 성장 대신 판타지를 선택하다

어른이 되지 않고 씩씩하게 사는 법 

로드무비는 대체로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난다. 주인공은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일들을 경험한다. 여행이라 부를 수도, 모험이라 부를 수도 있을 일련의 과정을 겪은 인물은 어떠한 의미에서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 변화를 성장으로 본 많은 이들은 로드무비를 성장영화로 읽곤 한다. 

그러나 여기, 성장을 거부하는 한 여자가 있었으니, 최소한의 공간만을 서식처로 삼는 현대판 소공녀(micro-habitat) ‘미소’다. 영화 <소공녀>(전고운, 2017)는 그녀의 로드무비다.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헌혈을 사랑하는 미소의 여정은 2015년 1월 1일, 담뱃값이 폭등하면서 시작된다. ‘빚 없이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꼭 필요한 것만을 소비하고 그만큼의 노동만을 하며 살아가던 미소에게 담배 가격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무려 80퍼센트나 오른 건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으나,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집주인은 5년간 올리지 않던 월세를 5만 원 올리고, 늘 가던 바 역시 임대료가 올랐다며 위스키 값을 2,000원씩 인상한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일당 4만 5,000원의 가사도우미 수입으로는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자, 미소는 수입을 늘린다든지 술·담배를 줄이는 식의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해결책 대신 지출 금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거비를 과감히 지워버리고, 방을 빼기로 한다. 그리고 캐리어 가방 하나 분량의 단출한 짐을 싸 들고 한때 가족처럼 동고동락하며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렇게 시작되는 대책 없고 엉뚱한 미소의 여정에는 웃음과 슬픔의 페이소스가 교차된다. 소원하던 새에 친구들은 점심시간을 쪼개 링거를 맞아가며 더 큰 회사로 이직을 준비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거나, 이혼 준비를 하면서도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 회사를 다니거나, ‘전립선이 안 좋아 아무 짓도 못 하면서도’ 부모님을 위해 결혼을 생각하는 등 이른바 어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달걀 한 판씩을 사들고 친구들을 찾아간 미소는 일시적으로 거처를 ‘신세 지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따뜻한 밥을 해주고,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준다. 친구들은 은연중에 미소의 처지를 이용하기도 지레 판단 내리기도 하며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그러고는 미소에게 하나같이 말한다.  

  “넌 여전하구나.”  

보통의 사람에게 밤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 ― 그래도 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 시절은 ‘젊고 건강하고 철없는 한때’로 한정된다. 그렇기에 어른의 세계로 편입한 친구들은 미소에게 “너 멋있다, 용기 있어”라고 말하지만 그건 부러움이라기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 서서 자신들이 이미 지나왔다고 믿는 시기에 머물러 있는 ‘여전한 존재’를 향한 인세치레에 가깝다. 미학자 양효실의 말을 빌리자면 ‘용기’는 주체적인 자아가 원래부터 갖고 있던 힘, 그러므로 그냥 발휘하기만 하면 되는 내적 능력이 아니다.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생존법, 즉 더 잃을 게 없기에 어디든 가는 사람들의 긍정법¹인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누군가 대신 책임져주거나 봐주지 않는 것. 즉 자기 몫의 삶의 무게를 오롯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철없어 보이는 미소는 오히려 자기가 무얼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은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지를 극 중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대부분 로드무비의 주인공이 무언가에 쫓기거나,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특정 목적지를 향해 결연히 길을 떠나는 반면 미소의 여정은 주거비를 아껴보겠다는 극단의 결정과 친구들을 보고 싶다는 순순한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게 이 영화를 일종의 판타지로 보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영화가 진행되며 밴드 내에서 미소의 포지션은 보컬도, 기타나 드럼이나 키보드도 아닌 매니저임이 점차 밝혀진다. 그러니까 ‘여전한’ 미소가 친구들의 밥을 챙겨주고, 말없이 불평을 들어주고 돌봐준 건 가사도우미로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정체성이나 직업병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가난한 만화가 지망생인 남자친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의 고용주인 성매매 여성에게도 한 치의 세속적인 판단이나 반응 없이, 그저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어쩌면 철없지만 어른스럽고, 엄청나게 쿨한 동시에 믿을 수 없이 따뜻한 그녀, 미소라는 인물 자체가 이 영화의 최대 판타지이자 치트키일지 모르겠다. (쿨&웜의 조합이라니, 그건 마치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원하는 걸 지키려면 다 이 정도 고생은 하고 살아.”  

위 문장은 원래는 있었으나 촬영·편집 과정에서 사라진 미소의 대사로, “언닌 왜 자꾸 성장, 성장 거려!”와 함께 시나리오와 영화의 차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낸다. 시나리오에는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유기농 푸드트럭 사업을 벌였다가 망해서 빚을 진 일이나, 희귀병 때문에 과로하면 오히려 병원비가 더 든다는 등 가사도우미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단편적이나마 설명하고 있다.² 그러나 영화에서 그런 배경은 전면적으로 생략 또는 삭제된다. 이는 연출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미소라는 캐릭터에 고의적으로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로 읽힌다.  




당위와 맥락이 제거된 만큼 그녀는 철없고 공감을 얻기는 힘든, 그러나 더없이 사랑스러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당연히도 뭔가가 결여되어 있는 반면, 일반적 의미에서의 성장을 거부한 미소는 집과 고소득 직업을 제외하고는 결여된 것이 없는 듯 그려진다. 적어도 내게 이 설정은 다분히 판타지적인 장치로 여겨졌다. 결국 많은 이들이 ‘힐링 영화’라 회자하는 <소공녀>는 안온한 제도권 범주 바깥에서도 씩씩하고 온전한 미소라는 캐릭터를 통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그러나 따뜻한 대리만족을 덤덤히 제공하는 판타지 로드무비로 볼 수 있다.   
  

* 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현실문화, 2017. 
** 전고운, 『소공녀: 전고운 시나리오집』, 비단숲,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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