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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로운 Aug 25. 2023

단순하고 가벼울수록 좋아

8월 25일 일상일기

생각보다 일찍 눈을 떴다. 커튼을 열어놓고 잠에 들었는데, 뒷동 아파트 건물 위로 해가 떠오르자 고대로 내 얼굴로 햇빛이 쏟아졌다. 이 집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을 설치거나 잠 못 들며 괴로운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아주 가뿐하다. 오늘도 생각한 것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눈을 떴지만 가벼웠다. 햇빛에 눈을 뜨다니, 역시 집은 해가 잘 드는 남향이어야 하나. 


이제 막 구매한 요가매트를 도르르 거실 바닥에 펴고 그 위에 앉았다. 유튜브 요가 수업 하나를 골라서 틀어두고 요가를 시작한다. 비가 와장창 쏟아지고 난 며칠이 지나고, 오늘은 아주 화창하다. 바람까지 앞뒤로 솔솔 불어오는 것이 이제 드디어 여름의 끝이 왔나 생각했다. 아쉬우면서도 기분 좋은 아침. 몸을 풀어내는 순간에 스치는 바람까지, 완벽하다. 행복하다, 생각했다. 


금요일은 집에서 근무하는 날. 가볍게 요가를 끝내고 씻고 나와서 업무를 시작했다. 큰 일은 없지만 자잘 자잘하게 들어오는 일들을 해내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갔다. 일찍 집에 돌아온 짝꿍이 부엌에서 왔다 갔다 하더니 보드라운 초콜릿쿠키를 만들어왔다. 요즘 맛 들인 커피머신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내려 곁들였다. 남은 시간 업무를 끝낼 때까지 짝꿍이 거실에서 바람을 맞으며 소로록 낮잠에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금요일 오후다. 


"어떤 감각은 시간이 지나면 퇴화하는데 어떤 감각은 더 발달하는 것 같아"


짝꿍이 해준 강된장에 쌈을 싸 먹으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들수록 눈도 안 좋아지고 청력도 예만 못하겠지만 미각만큼은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릴 땐 식탁에 올라오면 눈길도 안 주던 된장이나 나물의 맛이 이렇게나 좋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간 모인 빨래를 돌리고 베란다에 널었다. 바람에 빨래가 휘날리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해도 잘 들고 바람까지 통하는 날이면 얼마나 빠삭하게 잘 마를까. 우리 집에는 건조기가 없다. 다들 건조기 구매를 추천했지만 오기로 구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가 잘 드는 걸, 바삭하게 마르는 빨래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저녁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쌓인 쓰레기를 내다 버렸다. 나간 김에 밤바람 맞으며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사실 딱히 걷고 싶진 않았지만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짝꿍의 손에 이끌려 따라나섰다. 이런 경우 종종 의도치 않은 행운을 만난다. 강아지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강아지들을 구경하는데 조막만 한 솜뭉치가 등장했다. 3개월 정도 된 아기 포메라니안이 겁도 없이 총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한 주간의 스트레스가 사악 풀릴 정도의 귀여움을 만났다. 강아지 운동장, 천국이 따로 없다.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순간순간이 행복하던 날. 가볍고 단순해서 더 좋은 8월 25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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