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수정 Oct 15. 2023

(2화) 산티아고순례길에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Day 0. 바르셀로나에서 생장피에드포르로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았다.

오늘은 산티아고순례길의 시작점인 '생장피에드포르 (이하 생장)'로 향하는 날이다. Day 0이랄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팜플로냐를 거쳐, 프랑스-스페인의 국경 마을인 생장으로 이동한다.

생장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 바로 순례길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Tip> 순례길의 루트는 어떻게 되고, 어디서 시작되나요?

산티아고순례길의 루트는 프랑스길, 포르투갈길, 북쪽길 등 다양하나,

프랑스-스페인 국경인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하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걷는 프랑스길이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이다.

어떤 길에서 시작하든 최종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다다른다.

순례자 루트들의 모습이 조개껍데기를 닮아, 조개껍데기는 순례자를 상징하는 심볼이 되었다.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다른 길들과는 다르게 프랑스길은 생장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출처: https://followthecamino.com/en/camino-de-santiago-routes/


대체로 프랑스 리 입국 → 프랑스 바욘 경유 → 프랑스 생장 이동 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순례길을 걷기 전 약 열흘간 유럽 여행을 한터라 순례에 불필요한 짐을 맡길 곳이 필요했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우체국에 짐 보관 서비스가 있는데,

스페인 내에서만 짐을 부칠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인 바르셀로나 입국 → 스페인 팜플로냐 경유 → 프랑스 생장 이동 편을 택했다.




아직은 캄캄한 새벽 6시 30분,

순례길에 필요한 짐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바르셀로나 한인민박 '용인이네'를 나섰다.

무사히 순례길을 마무리하길 바란다며 사장님께서 컵라면과 초콜렛 등을 바리바리 챙겨주셨다.

한국에서야 흔하디 흔한 컵라면이지만 외국에서는 가격도 비싸고 구하려면 아시아마트까지 가야 하는데...

고작 며칠 숙박했을 뿐인데 선뜻 한국 음식을 내어주신 사장님께 감사했다.

시작부터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하는구나 싶어서 뭉클했다.



아직 잠들어있는 도시의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짊어지고 한 걸음씩 떼 본다.

'아, 이게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구나'

앞으로 약 40일. 800km 동안 내가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할 무게.

참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오늘인데.. 이상하게도 순례길을 걷는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깨에 전해지는 가방의 무게만이 내가 순례길의 Day 0을 맞이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깨에 전해지는 무게감 외에는 순례길로 향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 이거 실화냐...?'

에라 모르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뭐라도 먹자 싶어서 기차역 근처 카페에서 핫초코를 하나 사 먹었다.

단 것을 먹었더니 왠지 잘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뿜뿜 차오른다.

역시 스페인 카카오 짱이다!



고속열차 렌페를 타고 약 4시간을 달려 팜플로냐에 도착했다.

원래 팜플로냐는 순례길 3일 차에 도착하는 도시지만, 나에게는 순례길에서 마주한 첫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웬 걸,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나는 순례길에 위치한 도시면 모두 중세의 느낌을 고이 간작한 앤티크한 곳일 줄 알았는데

구도심을 제외하면 여타 도시와는 다를 것 없는 현대적인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스페인의 모두는 2019년을 살고 있고, 내가 시간을 역행하는 것일 뿐인데

내 편할 대로 상상했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예전에 동양에 처음 온 서양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버스로 환승을 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서,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카페인 <Cafe Iruna>에 갔다.

가볍게 요기를 하기 위해 미니버거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외국에 나오면 어쩜 이렇게 맥주가 맛있는지!

헤밍웨이가 여기서 그 당시 문호들과 대화를 나눴을 것이라 생각하며 감정이입하니 왠지 나까지도 지식인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홀로 온 순례자...^___^

출처: 구글맵

맥주를 마시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보다 순례자들이 별로 없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어디선가 반가운 한국말이 들려왔다.


"순례길 처음이신가 봐요!"

뒤를 돌아보니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한국인 여성분께서 나에게 인사를 하셨다.


딱 봐도 등산화에 배낭차림!

순례길에서 처음 순례자 동지를 만난 순간! 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분은 두 번째 순례길을 걷는 중인데 첫 번째 순례 때 급하게 걸은 것이 아쉬워서, 이번에는 아예 돌아가는 티켓을 끊어놓지 않으셨단다. 하루에 5~10km 정도씩 여유를 즐기며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고 계시다고.

(대부분은 하루에 20~40km를 걷는다)


나는 첫 순례길을 시작도 안 했는데...! 완주를 하고 한 번 더 걷는 분이 계시다니!!! 너무 멋지다...

나도 이 길을 2번씩이나 오고 싶을까? 그렇게까지 이 길에 매력이 있는 걸까?

겪어봐야 알겠지...?

순례길 선배님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듣고, 근처 보다폰 매장에서 유심을 산 후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와우! 이제야 순례길에 왔다는 실감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같이 줄 서있는 금발머리 아주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니, 역시 이분도 순례자가 맞다.

까미노가 처음이라며 기대된다고 하시는데, 표정에서 설렘과 긴장이 묻어 나왔다.

아마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 같은 표정이었겠지 :-)


설레는 마음을 안고 버스를 탔지만 타자마자 기절한 듯이 잠들었고 (나 혼자 천하태평이다),

1시간 50분 정도를 달려 생장피에드포트에 도착했다.




순례의 시작을 알리는 마을, 생장!

작지만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에 국경에 위치하지만 신기하게도 건축양식은 독일풍이 나기도 하는 이 마을에는,

곳곳에 순례자를 위한 화살표와 표지판들이 자리하고 있어

정말 순례의 마을이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보스턴 아주머니와 순례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필수 코스를 함께 하기로 했다.

바로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 여권(Credential) 발급받기!!

여행자들이 여행을 다닐 때 여권을 가지고 다니듯, 순례자들도 순례자 여권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이 여권을 소지해야 순례자 전용 숙소를 이용할 수 있고, 각 마을/도시마다 스탬프를 발급받아 완주 후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아주머니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담소를 나누다 보니 금세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했다.

봉사자분들이 지도와 주의사항, 숙소를 안내해 주시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을 쾅 찍어주셨다.  

순례자를 의미하는 조개껍데기까지 받고 나니 이제부터는 정말 순례길이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약 40일간 함께 할 나의 친구, 잘 부탁해!



순례자 사무소에서 배정해 준 숙소 (알베르게)로 이동해 짐을 내려놓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


<Tip> 순례자들은 어디서 자고 어디서 먹나요?

순례자들은 보통 순례자 전용 숙소에 숙박하는데, '알베르게'라고 부른다. (알베르게는 호스텔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지만, 순례길에서 알베르게 = 순례자 전용 숙소로 인식된다.)

1박에 5유로~15유로 내외의 저렴한 금액으로 숙박을 제공받을 수 있다.

보통 아침은 알베르게에서 제공받거나 근처의 바에서 가볍게 먹고

점심은 마을의 식당에서 순례자메뉴를 먹는다. (고기, 감자 등 고열량 식단으로 구성됨)

저녁은 알베르게 주방에서 순례자들과 함께 요리를 해 나눠먹는 경우가 많다.



숙소에 돌아오니 이 층침대에 자리한 사람들의 표정이 자뭇 진지하다.

순례길 첫날을 함께할 사람들과 함께 먹으려고 마트에서 간식을 조금 사 왔는데, 분위기가 너무 적막하여 주변의 순례자들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다들 내일부터 시작될 순례길을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사람도, 짐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 혼자 천하태평한가?ㅎㅎ


아무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지론에 따라 또다시 나는 먹기로 했다.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인 순례길의 시작이니 든든하게 먹어야지 싶어서

용인이네 민박집 사장님이 챙겨주신 한국인의 소울푸드 컵라면을 꺼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냄새날까 봐...)

따뜻한 국물만큼이나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아 시작이 좋다~~!

컵라면 하나에 시작이 좋다고 하는 것도 웃겼지만, 그냥 뭐든 좋은 일만 펼쳐질 것 같았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든든하게 컵라면을 먹고 순례길 전야를 마무리했다.



작가의 이전글 (1화) 산티아고순례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