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저 여기 관둘까 해요. 사실 감기도 요 며칠 생각이 많아져서 못 먹고 밤에 잠을 설쳤더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온 것 같아요.”
“왜요....? 이유 물어도 돼요?”
“이곳이 저랑 맞는 회사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앞으로 이 업무를 잘 해낼지도 의문이고요. 원래 쓰던 글과 다르다 보니 지금부터 배워서 해나가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업무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럴 게 아니라 시원한 거라도 마실 겸 근처 카페로 가자고 했다.
“자, 들어요. 빈 속에 약 먹으면 속 버려요.”
주민하 앞에 달콤한 카야 토스트와 레모네이드를 놔주고 내 몫의 ‘아바라’를 쭉 들이켰다. 갑자기 따라 나오느라 정신이 없어 나도 한숨 돌려야 했다. 주민하는 빵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안 건드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샌드위치를 반쯤 먹은 주민하가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왜 빈 손으로 회사를 다니는지 궁금했죠?”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가방을 갖고 다니든 말든 회사에 개인 물건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해야 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지만 간절히 궁금했던 건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이유가 두 갠데, 하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에요. 직원들이 절 두고 미니멀리스트니 뭐니 하는 것 같던데, 전혀 아니에요. 미니멀리스트도 취향이 있어야죠. 저는 그냥 뭐가 없거든요.”
“뭐 그럴 수 있죠. 물건 사는 걸 싫어할 수도 있는 거고. 그나저나 옆자리에서 아주 곤혹스러웠겠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가 도착하는 사람이라...”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이라 보기 좋았어요. 아주 가끔 대리만족도 했고요.”
주민하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더 달게 마셨다. 시고 단 음료가 들어가니 컨디션이 좀 돌아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커피 대신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나는 내 몫의 커피를 마셨다. 거리감이 느껴지던 주민하가 이제야 또래처럼 보였다.
“물건 사는 덴 아무 관심이 없지만 꼭 사고 싶은 건 하나 있어요. 그것 때문에 돈을 좀 많이 모아야 하기도 하고요.”
“혹시... 집?”
“네. 어릴 때부터 월세 전세로만 살아서 이사 다니는 게 너무 지겨웠어요. 부모님이 경제력이 없었어요. 돈을 벌게 되면 꼭 집부터 장만하리라 다짐했어요. 이게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돈을 모아야 해서 물건에 관심을 끊게 된 걸지도 몰라요.”
“그럼 나머지 하난 뭐예요?”
“그건 회사에 제 물건을 하나도 두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주민하는 다니는 곳마다 적응하는 게 무척 힘들었다.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그 안에 업무를 잘 해내지 못해 수습기간에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회사마다 1년을 못 버티고 퇴사하기 일쑤였고 때론 일주일 근무하고 나온 곳도 있었다. 퇴사가 잦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정을 쌓지 않게 됐고 되레 차갑게 굴었다. 차라리 무관심이 편했다. 퇴사나 이직을 할 때마다 사무실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하는 게 버거웠다.
“저 퇴사해요.”
“저 오늘까지만 근무해요.”
때마다 박스에 바리바리 물건을 챙겨야 하는 것도 지겨웠다. 자신이 적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인정해 버린 뒤에는 회사에 그 어떤 소지품도 갖다 놓지 않았다. 가져가야 할 물건이 없으니 퇴근하면서 퇴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저더러 인사도 안 하고 갔다고 뭐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전 했거든요. 좀 다르게.”
“퇴사 인사를요?”
“네.”
“어떻게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게 무슨 퇴사 인사예요?”
“평소에는, 그러니까 내일도 출근할 땐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어요.”
“아... 그러니까 퇴사할 땐 ‘내일 봬요’를 뺐다?”
“좀 어이없죠?”
그게 주민하만의 퇴사 인사였다. 그렇게라도 인사를 달리하니 직원들은 인사도 없이 갔다고 뭐라 할지언정 자신은 떳떳했고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고 했다.
“회사에 짐이 없으니 그게 너무 편하더라고요.”
“그래도 그건... 너무 입사부터 퇴사를 생각하는 셈인 거잖아요. 연인으로 치자면 만남부터 이별을 생각하는 거고.”
주민하는 말없이 앞에 놓인 유리컵을 바라봤다.
주민하의 속사정을 듣고 있자니 그와 달라도 너무 다른 내가 물건을 많이 사고 특히나 회사에 개인 소지품을 많이 갖다 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는 반대로 회사와 사람들에게 정을 붙이려고 노력한 거였네요. 내 물건이 많아야 진짜 내 자리 같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힘들 때마다 귀여운 캐릭터 제품 사는 버릇이 있어요. 하다못해 볼펜 하나를 쇼핑해도 머리 부분에 앙증맞은 펭귄 캐릭터가 올라간 걸로요. 그 물건 배송될 때까지 기다리면서 버티고 물건 도착하면 그걸 쓰면서 또 힘든 거 버티고... 그랬던 것 같네요. 물건을 사면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져주고요, 어찌 보면 물건으로 나를 인정받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어요. 참 부질없는 건데.”
“아니에요. 그건 그것대로 소중한 게 많은 삶이잖아요. 지킬 게 있는 삶이고요.”
“그런 가아... 그 노무 카드값이 문제죠. 로또를 사야 되나!”
시계를 보니 병원 간다고 나온 지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주민하는 남은 카야 토스트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사무실에서 마시는 커피를 제외하고 뭔가를 먹는 주민하를 본 게 처음이라 낯설었다. 왠지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스쳤다.
7월 한낮의 찜통더위는 살갗을 따갑게 만들었다.
“아! 사무실에 양산 있는데 가지고 나올걸. 핸디 선풍기도 까먹었어!”
혼자 중얼거리는 날 보고 주민하가 큭, 하고 웃었다.
“나 때문에 정신없이 나왔잖아요.”
주민하와 이야기 나누고 걷는 게 익숙해진 탓인지 어떤 연유로 회사 밖을 나왔는지 잠시 까먹었다.
“난 여름을 제일 좋아해요.”
주민하는 깜짝 놀라며 자신도 사계절 중 여름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드디어 우리 사이에 공통점이 발견됐다.
*<올여름 OO기획전>은 개인사정으로 잠시 휴재합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