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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뫼 Aug 04. 2023

물닭갈비를 먹을 때 꼭 있어야 하는 것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던 7월 중순의 어느 날, 여자 셋이 서울 상도동에 모였다. 셋 중 누구와도 인연이 없는 상도동에 모인 이유는 바로 추억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여자 셋은 대학 선후배 관계로 한때 동고동락한 사이다. 그들은 대학시절 학교 앞에서 주기적으로 이 국물 음식을 먹었는데 학교 앞 식당이 없어져 추억의 맛을 느끼러 월요일 아침, 낯선 동네까지 오픈런을 하러 간 것이었다.    

  

물닭갈비라고 들어는 보셨는지. 때는 내가 스무 살이던 2000년대 초중반, 그 당시 그냥 철판닭갈비도 몇 번 먹어본 적 없는 나는 선배들에게 이끌려 학교 아래에 있는 ‘○○○○ 물닭갈비’ 집에 가게 되었다. 지금이야 맛집 정보가 차고 넘치니 물닭갈비가 강원도 태백 지역 음식이라는 게 알려져 있지만 한동안 나는 물닭갈비라는 음식이 내가 다닌 학교 앞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인 줄 알았다.

     

“너 물닭갈비 먹어 봤어? 그게 처음 먹으면 맛있는 줄 몰라. 처음엔 ‘이게 무슨 맛이지?’ 할 수 있어. 근데 그거에 맛 들이면 ‘선배, 제발 물닭갈비 먹으러 가요.’ 할지도 몰라.”

     

그 얘기를 하는 c선배도 자신이 신입생 때 들었을 선배들의 단골 레퍼토리를 나에게 해주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지 않은 홀에 나무 무늬를 흉내 낸 두꺼운 좌식 테이블이 쪼르륵 놓여 있었다. 벽면에는 한지에 붓글씨로 쓴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라는 메뉴가 붙어 있었다. 선배 몇몇이 “절씨구에 사리 추가하고 밥 볶아 먹으면 돼” “아니야, 지화자는 먹어야지” 하면서 약간의 언쟁(?)을 벌이다 서로 타협을 하고 메뉴를 시켰다.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에 테이블에는 소주와 별로 맛있어 보이지 않는, 고춧가루가 적게 묻은 배추김치가 놓였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한 선배가 말했다.      


“물닭갈비에는 이 김치가 딱이야.”     


그리고 잠시 뒤, 사장님이 뻘건 국물이 찰랑찰랑 거리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깊지 않은 팬(그 팬을 그리들이라고 부르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을 들고 오셨다. 팬 가장 위에는 생닭이 펼쳐져 올라가 있었고 주변부에는 떡볶이 떡, 대파 채, 얇게 썬 감자 등이 있었다. 나는 팬에 눈을 고정시키고 육수가 얼른 끓기만을 기다렸다. 그곳에 있는 나 자신도 어색하고 육수 위에 덩그러니 놓인 생닭도 낯설기만 했다. 다행히 알맞은 타이밍에 사장님이 가위와 집게를 들고 테이블로 와 생닭을 뼈째 가위로 서걱서걱 잘라주셨다. 나는 사장님의 손놀림에 집중하며 혼자만의 어색함을 달랬다.      


사장님이 돌아가자 우리는 서로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번 마감도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슬슬 따뜻해지기 시작한 4월의 어느 토요일 저녁, 아직은 낯선 사람들과 아직은 낯선 동네에서 생짜 초면인 물닭갈비라는 음식을 앞에 두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날 물닭갈비를 함께 먹은 사람들은 학보사 선배들이다. 당시 마감 뒤 가장 만만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는 바로 물닭갈비였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고기와 탄수화물 모두 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소주 안주로 먹을 수 있는 국물이 있는 메뉴였기 때문이다.   

   

새롭게 고백하건대 나는 국물 러버임과 동시에 탄수화물 러버다. 국물과 탄수화물보다 좋은 소주 안주가 있을까(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안주에 대한 관심은 늘 지대하다). 닭을 포함한 건더기를 다 먹으면 육수를 더 붓고 라면 사리를 넣어 끓였다. 휴대용 버너 위에 두고 끓여 먹는 방식이라 닭 육수가 계속 올라와 라면 사리는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볶음밥은 또 ‘말해 뭐 해’고. 사장님이 직접 만들어 주는 볶음밥에는 자른 부추와 김가루, 그리고 특이하게 들기름이 들어갔다. 밥알이 두 겹 이상으로 쌓이지 않는 게 그 집 볶음밥의 특징이었다. 팬에 눌어붙은 볶음밥을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먹은 것도 난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쯤에서 허여멀건 배추김치 얘기를 해보자. 허여멀건 배추김치는 과연 물닭갈비와 환상의 짝꿍이었다. 매운탕만큼 탁하진 않지만 아주 맑지도 않은 물닭갈비는 짜거나 맵지 않은 시원한 배추김치와 궁합이 참 잘 맞았다. 마치 치킨과 치킨무, 짜장면과 단무지의 조합이랄까. 그 배추김치는 말랑말랑한 밀떡과도 어울렸고 퍽퍽한 닭가슴살 부위와도 어울렸으며 라면 사리, 볶음밥과도 물론 잘 맞았다. 흔한 말이지만 신의 한 수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이번에 선배들과 방문한 식당에서는 아쉽게도 그 배추김치 대신 깍두기가 나왔다. 참고로 ‘○○○○ 물닭갈비’는 체인이지만 흔하지 않은 식당이다(현재 네이버 검색 기준 다섯 곳이 있다. 본점은 의정부에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지점들은 모두 오래된 곳들이다. 본점의 사장님이 태백의 물닭갈비를 호불호 없이 좀 더 대중적인 맛으로 개발했다고 한다. 상도동 지점도 한 자리에서 22년째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 배추김치가 내가 먹은 지점에서만 나온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깍두기로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그 배추김치까지 먹었더라면 나의 호들갑에 오히려 선배들이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난 남편에게도 이 물닭갈비를 맛보게 해주고 싶어 포장을 해 가 저녁에 끓여 줬지만 아쉽게도 남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문제는 나 역시 비슷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우리 집과 식당은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똑같이 식탁 앞에서 끓이며 먹었지만 일단 가스와 인덕션의 화력 차이가 컸고, 음식을 끓이는 냄비의 차이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 벽에는 한지가 붙어 있지도, 붓글씨가 쓰여 있지도 않았고, 두꺼운 나무 무늬 테이블도 없었고, 생닭을 서걱서걱 잘라주는 친절한 사장님도 없었고…. 아무튼 우리 집에는 없는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배들이 없었다. 그날 상도동에서 오랜만에 먹은 물닭갈비에 허여멀건 배추김치가 빠져 있었지만 먹으면서 의외로 아쉬움이 생기진 않았던 건 물닭갈비를 먹을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나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년 전에는 낯설기만 했던 선배들과 물닭갈비였는데(이상하게 읽힐지 모르지만 낯설었다는 점에서 선배들과 물닭갈비는 어쩌면 동급이겠다) 이제는 내가 먼저 물닭갈비를 먹으러 가자고 선배들을 조르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날 우리는 소주 대신 동동주를 마셨다. 이른 시간이라 쓴 소주가 당기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날은 20년 전처럼 고된 마감을 끝내고 먹는 ‘뒤풀이 음식’이 아니라 ‘추억의 음식’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동동주의 달달함이 끌렸던 것 같다. 오랫동안 물닭갈비를 먹지 못했을 때는 언젠가 꼭 먹으러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한풀이하듯 먹고 나니 이제는 그 마음이 사라진 것 같다. 대신 선배들과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건 어디든 언제든 대환영이다. 애들 방학 끝나면 조만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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