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국물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제 새롭지도 않지만 새롭지 않아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바로 한국인의 못 말리는 국 사랑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반찬이 없을 때 괜찮은 국만 있으면 따뜻한 한 끼를 먹을 수 있고, 먹일 수도 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짤 중, 아이들이 유독 환장하는 음식 목록 첫 번째에 ‘미역국 만 밥’ 사진이 있는 걸 본 적 있는데 그걸 반박할 한국인 아마 없을 거다(나도 지난주 3일 연달아 아이에게 미역국에 밥을 말아 주었다. 매 끼니는 아니고).
나의 국 사랑 역시 오랜 시간 학습되어 온 것인데, 그것의 시작에는 물론 엄마가 있고 또 아빠가 있다. 엄마는 아빠의 니즈에 맞춰 아침, 저녁마다 국이나 찌개를 끓였다. 저녁에는 국이나 찌개 둘 다 가능했지만 아침에는 웬만해선 국이어야 했다. 전날 먹은 찌개를 내면 아빠는 “맑은 국 없어?”라고 아침 식탁에서 귀여운(?) 반찬 투정을 하셨다. 아침 일찍 국을 끓이기 힘들었던 엄마는 가끔 전날 밤, 다음날 아침에 먹을 국을 끓였다.
밤 10시, 11시까지 엄마가 부엌에서 달그락 거릴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냉장고 청소를 하는 날이다. 방에서 심심해진 나는 소리가 나는 부엌에 슬쩍 나가본다. 엄마의 냉장고 청소가 끝나가는 와중에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서 무언가가 김을 내며 열심히 끓고 있다. 나는 안다. 그 냄비 안에 김치콩나물국이 있다는 것을.
일반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를 통틀어 냉장고 안에서 가장 덩치 큰 녀석은 역시 김치통이다. 큰 김치통에 김치가 절반도 안 되게 남이 있으면 정리대상 1순위다. 일부는 잘라 반찬통에 넣고 또 일부는 멸치와 다시마로 펄펄 끓인 우린 육수 속에 들어간다. 김치가 좀 익으면 콩나물을 넣고 더 끓인다. 마지막으로 어슷하게 썬 대파와 후춧가루를 넣으면 얼큰 칼칼한 김치콩나물국 완성.
내가 알면서도 “엄마, 뭐 끓여?” 하고 슬쩍 다가가면 엄마는 즉답 대신 여태까지 자신이 처리한 것들을 알려준다. “김치통 부셨어, 안 먹는 건 싹 버리고. 뭐 이렇게 안 먹는 게 많냐?” 그러고 나서야 내 질문에 대답한다.
“김치콩나물국 먹어 봐, 간도 안 봤어.”
그럼 난 깊은 냄비에서 펄펄 끓고 있는 국을 대접 한가득 퍼 식탁으로 가져간다. 처음엔 너무 뜨거워 잘 먹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식으면 술술 들어간다. 아주 푹 익지 않은 콩나물의 아삭 거림이 좋다. 처음 끓인 김치콩나물국은 짜지 않고 시원해 나는 밥 말아먹지 않는 걸 더 좋아한다. 한 그릇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면 배 속이 뜨끈해지면서 목은 얼얼하다. 한 그릇에서 멈추기가 힘들다. 나는 처음보다는 못하지만 또 거의 한 그릇을 채워 국을 푼다. 국을 푸며 “내가 너무 다 먹는 거 아니야?” 물으면 엄마는 “내일은 내일이고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하며 딸의 체중 증량에 힘을 보태줬다.
김치콩나물국은 이상하게 그다음 날 먹으면 이 맛이 안 난다. 김이 나게 끓였대도 처음 막 팔팔 끓었을 때처럼 뜨끈하지도 않은 것 같고 콩나물도 숨이 많이 죽어 시원한 맛도 덜한 것 같다. 아빠는 절대 알지 못할, 늦은 밤 부엌을 기웃대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맛을 느낀 나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들기며 방으로 들어간다.
시뻘건 김치 국물에 콩나물이 들어가는 순간.
주부가 된 나는 이제 엄마의 김치콩나물국을 응용해 어묵김치콩나물국을 끓인다. 남편이 아침에 제일 좋아하는 국이다. 술 마신 다음날은 특히나 좋아한다. 끓이기도 쉽다. 요즘 코인 육수를 즐겨 사용하는데 김치랑 코인 육수를 처음부터 같이 넣어 끓이다 코인 육수가 다 분해되면 콩나물과 어묵을 넣어 콩나물이 익을 때까지 끓이면 된다. 어묵이 있어 배도 차고 해장도 돼 술 안 먹은 내가 먹어도 시원하고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