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선생님 May 18. 2019

네가 잘 지내면 내가 배가 아프잖아

다시 쓰는 찌질의 역사

전남친(여친) 인스타 검색하기에 좋은 시간 오후 11시


전애인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고 싶은 욕구는 세상 3대 욕구를 뛰어넘는다. 잘~먹고 잘~살다가도 문득 드는 그 염탐의 욕구는 식욕, 성욕을 모두 뛰어넘어 손가락을 지배한다. 한 편으로는 '후후 내가 더 살고 있을걸?' 하는 마음과 '이제 아이디도 기억 안 나는데 어떻게 볼 수 있겠어?' 하는 이성이 공존하기에 일단 한 번 가볍게 검색이나 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사람이 평생에 쓰는 아이디의 수는 한정적이다. 그리고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나도 전 남친(여친)의 아이디는 잊히지 않는다. 내가 소름 끼치게 머리가 좋은 건가? 아니면 너무 질척대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내 전남친들도 내 인스타 스토리를 들락거리는 걸 보면 다들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그렇게 아주 쉽게 입성한 전남친(전여친)의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화나는 포인트는 5가지 정도다.


1. 여자 친구(남자 친구, 혹은 아내나 남편)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음
2. 잘 먹고
3. 잘 살고 있음
4. 1과 함께 2와 3을 함
5. 그냥 화남

뜻밖에 동시에 알던 (그러나 지금은 나랑 멀어진) 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반가운 것도 잠시, 새 애인과 나와 갔었던 여행지에 가고 나와 갔던 데이트 코스에 가는 걸 발견한다.


아 레퍼토리 좀 바꿔라 이 새끼야


라고 아무리 외쳐도 어차피 이 글의 결말은 뻔하다. 내가 졌다.


물론 나도 잘 먹고 잘살고 있다만, 머리숱도 많고 키도 훨씬 큰 남자들을 만난 적도 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진 느낌이 든다. 그것도 매우 굉장히 진 느낌.


물론, 내가 헤어진 지 n개월 차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식의 위로를 받을 법하다. 하지만 내가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지는 이미 n년이 흘렀다. 그러니 나는 찌질한 게 맞다.



찌질의 역사 


평상시에 쌓아왔던 교양과 쿨함이 모두 무너지는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다. 내가 전남친(여친) 보다 못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내 마음속에 꾸깃꾸깃 접어서 숨겨둔 찌질함이 머리를 번쩍 쳐든다.


이 찌질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인생의 극적인 순간마다 빛을 발했던 친구다. 덕분에 처참하게 망한 기억을 안겨줬었다.


바람핀 남자친구 앞에서 화도 못 내고 울기 (그래도 좋아했음)
인격 모독을 하는 상사 아래서 일 년이나 일하기 (다른 데 못 갈까 봐 쫄았음)
정말 안 맞는 동행과 같이 다니려고 원래의 계획을 몽땅 포기하기 (혼자 다닐 용기가 없었음)  


내 인생에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이 찌질함은 '아! X 망했다'라고 깨달은 후에 더 강해지는 속성을 지녔다. 그 덕에 나는 늘 더 처절하게 찌질해졌다.


바람핀 남자친구 -> 헤어질 때 다시 생각해달라고 매달림
인격 모독을 하는 상사  -> 마지막 날 감사했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는데 무시당함
정말 안 맞는 동행 -> 한국에서 또 보자는 말에 카톡 보냈다가 읽씹 당함  


찌질에 대한 변명


하지만 나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옛날 같았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거나, 방탕하게 살겠다며 빵을 잔뜩 먹거나, 엄마 몰래 탄산음료는 몇 캔씩 마시며 방황했겠지만 성숙한 어른인 나는 워드를 켰다. 이게 바로 내 찌질함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가 있나? 이렇게 침착한데?


게다가 나는 꽤 성숙한 사람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인생의 망한 순간에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헤어질 때 다시 생각해달라고 매달림 -> 바람기 있는 남자(여자)랑은 친구도 안 하는 선비로 거듭남
나쁜 상사에게 마지막 인사했는데 무시당함 -> 아니다 싶으면 바로 이직 준비하는 프로 이직러가 됨
 한국에서 또 보자는 말에 카톡 보냈다가 읽씹 당함 -> 여행은 혼자다! 를 외치는 혼자 여행러 됨  


덕분에 나는 단호하고, 내 것을 잘 챙기며, 혼자임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 어른스러움이 전남친 인스타그램 게시물 몇 개에 무너지는 건 그만큼 성숙함이 빈약하기 때문일 테지만, 그렇다고 전남친한테 '잘 살아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찌질에도 인격이 있다면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줘야지. 차마 마음에 없는 말은 도저히 못 하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인데,


네가 그렇게 잘 살면 어떡하냐! 나보다 못 살아라! 아이고 배 아파라~  

  



ps. 여러분 나만 이렇게 찌질한 거 아니죠..? 빨리 아니라고 해줘




작가의 이전글 터무니없는 엄마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