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사귈래?' 방금 N번째 연애가 시작됐다
'우미씨, 제가 많은 건 약속할 수 없지만 우미씨 배신안하고 항상 더 많이 좋아해줄께요. 나랑 사귀어주세요.’
N번째 연애의 시작을 코앞에 둔 순간 생각했다. 살짝 구겨진 파란색 티셔츠, 바닷바람에 날려서 부스스한 머리가 귀엽다고. 나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다.
N번째 연애는 애송이 같았던 이전과는 다르다. 일부러 카톡 답장을 늦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침에 먼저 눈을 뜨면 선톡을 보내고, 먼저 다가서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내 맘에 드는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렵다는 걸 잘 안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난 타이밍에 딱 애인이 없으며 기적같이 나를 좋아할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도 안다. 그래서 맘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손을 번쩍 든다.
'나! 나 여기 있어! 혹시 나 어때?'
혹시 나한테 원하는 거 있어요?
라고 묻는 남자친구(연애 1일 차)에게 쏟아낼 100개의 말을 생각했다.
1. 우선 바람피면 죽는다. 그냥 너랑 나랑 같이 죽는 거다. 난 유경험자이므로 침착하게 널 처단하겠다
2. 전 여자 친구랑 문자라도 한 통이라도 하면 바로 헤어지는 거다. 이유 불문 시간 불문 내용 불문
3. 다른 약속은 후통보지만 이성과의 약속은 컨펌 후에 진행한다. 가족 아닌 이성은 누구든 동일
등등
하지만 그 모든 말이 쓸데없는 말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N-1번의 연애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딱 하나였다. 연애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다짐하는 거라는 걸.
1. 상대를 더 믿어주고 신뢰하기 ( + 바람필 낌새가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떠나기)
2. 변함없이 예뻐해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점점 익숙해지는 서로의 모습에 서운해하지 않기
3.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기를 바라기보다는 상대의 작은 단점도 예쁘게 봐주기
내 이전의 연애는 연애 첫날 하는 약속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깨져가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 약속이 깨질 때마다 상대를 원망하고 나 자신을 탓했다. 내가 더 예뻤으면, 내가 더 성숙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책하며 떠나가는 상대를 붙잡았다. 그럴수록 나도 상대방도 불행해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래서 N번째 연애를 막 시작한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내가 잘할게'하는 추상적인 약속뿐이다. '잘-'하겠다는 그 추상적인 말이 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조바심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다. 속으로는 너무 잘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리면서도 겉으로는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한다. 내가 잘할게-
어쨌든 모든 연애는 늘 미숙하다. 몇 번째 연애이든 그 사람과의 사랑은 처음이어서 모든 게 낯설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내가 줄 수 있는 건 진심뿐이라 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보낸다.
아마도 내 다짐들도 지켜지지 못할 때가 더 많을 거다. 모두의 연애가 그렇듯이 우리의 연애도 유치함과 변덕으로 얼룩덜룩 해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서로 원망하지 않고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번 연애는 조금 더 예쁘지 않을까.
방금 막 N번째 연애가 시작됐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