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래 Jan 29. 2021

[달래에세이2] 조금만 천천히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시작 







오-피스제주 에서 보이는 조천리




오래되고 허름한 간판들, 
종종 보이는 어르신들,
낡은 대문과 정리되지 않은 식물들,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새들의 날갯짓, 
습기와 바람을 머금은 바다 내음,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 운동장, 





제주 살이 5년 차. 

서울에서 남편은 건축, 인테리어, 마을 일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번아웃 비슷한 증후군이 찾아왔고, 나 또한 워킹맘-전업맘-독박 육아를 견디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우리는 오랫동안 꿈꾸던 제주살이를 실행에 옮겼다. 처음 2년은 남편에게 좋은 기회가 연결되어 공무원이라는 이름으로 안정을 누렸지만, 남편 스스로에게는 안정과 비전은 없었다. 결국 우리는 또 한 번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우리는 그 결정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오-피스제주(코워킹스페이스+숙소)



'오-피스제주'라는 공간을 꾸리고 운영하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주 동쪽 외곽의 시작, '조천'이라는 마을에 살게 되었다. 

조천은 바닷가에 위치한 갯마을. 아주 동쪽은 아니지만 해 돋는 아침(아침 조 朝, 하늘 천 天) 을 맞이하기에 알맞은 장소라고 하여 '조천'이라 지었다 한다. 제주 사람들에게는 그저 바람이 너무 센 곳이라 '조천 아주망들이 앉았다 선 자리엔 풀도 안 난다'라고 할 정도로 조천 사람들은 드세고, 거칠다 이렇게 유명할 뿐이지만...


1년 가까이 조천에 살며, 왜 제주에 온 처음부터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이 마을을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가 운영하는 사업장이 조천에 위치했고,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 시설마저 조천-함덕 그리고 인근에 다 위치해 있어 우리는 완전히 '로컬 라이프'를 실현하며 살고 있다. 


집에서 '오-피스제주'로 향하는 길에는 <조천 대섬>이라는 철새 도래지가 있다. 바다를 끼고 있지만  제주의 큰 현무암들이 방파제처럼 울타리를 치고 있어  잔잔한 호수의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바다. 수많은 종류의 새들이 다음의 스텝을 위해 가만히 숨을 쉬며 노닐고 있는 곳, 평화 그 자체. 

집-오피스를 오가며 바쁜 상황에서도 대섬 특유의 평안을 누리고 싶어 1초라도 고개를 돌리는 곳. 



<조천대섬> 의 풍경들





그나마 북적(?) 거리는 농협 하나로 마트가 있는 조천 마을 길은 조천이 얼마나 변화가 없었는지, 발전이 더딘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이 우리가 조천에 자리 잡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조천보다 조금 더 오른쪽인 함덕-구좌 쪽에는 이미 많은 관광객들로 짧은 시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좋기도 하고 아쉬운 점도 있을 그 마을들에 반해 조천은 아직 우리가 모르는 아름다움이 곳곳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 신비가 있었다. 


실제로 곳곳에 조그 많게 숨겨져 있는 가게, 상점들은 각자의 매력을 조용하게 발산하며 운영되고 있고, 몇십 년 된 오래된 주택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걷는 올레길은 나를 일본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조천리 마을 길



오래되고 허름한 한글 간판들, 종종 보이는 어르신들, 낡은 대문과 정리되지 않은 식물들,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새들의 날갯짓, 습기와 바람을 머금은 바다 내음, 첫째 아이가 다니는 학교 운동장. 

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불안했던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 도망치듯,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나 하는 절망감이 올라올 때면 내 사진첩을 메우고 있는 마을의 흔적들로 처방한다. 


조천 이 작은 마을은 아름다운 것들을 연료 삼아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법을 알게 해 주었다. 나의 많은 욕심과 어두운 면을 희석시켜 주기도 했고, 가시 돋친 나를 가만히 헤아려주기도 했다. 가끔 첫째 아이가 너무 심심하다고 빽빽대기도 하지만 내가 살던 곳을 노래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훗날 이 글로 첫째 아이에게 인증받을 수 있을까? 




첫째아이와 함께하는 조천리



어쨌든 조천 이곳은 마을 길에 있는 카페 이름처럼 "(조)금만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살고 있어도 그리운 마음이 들게 하는 참으로 오묘한 곳이다. 




<조금만 천천히> 카페 



#제주 #제주살이 #조천 #제주동쪽 #조천리 #제주여행 #로컬라이프 #오피스제주 

작가의 이전글 [책리뷰2] 쓸 만한 인간 (배우 박정민 산문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