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가족의 농담 하나를 빌리고, 비극 하나를 빌려 출발한 이 소설.
농담과 비극에서 파생한 이 긴긴한 이야기는 짜고-쓰고 기존에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맛이 나는 것 같았고, 읽는 내내 내 감정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여느 대가족 이야기 같으면서도 한사람 한 사람을 조명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숨죽이고 지켜보게 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가지의 사람들은 '심시선'이라는 예술가; 그 시절에 한국에서 존재하기 힘든 여성상을 내뿜으며 작품을 써 내려갔던; 독특한 행동으로 인해 다양한 의견으로 주목받았던 작가,의 자녀들-손주들이다. 그들은 심시선 여사의 돌아오는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그녀가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하와이에서 '기이한 제사'를 드리기로 감행한다. 출발부터 너무나 흥미로웠고, 자녀-손주들의 캐릭터도 너무 분명해서 화자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훑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작가님 천재)
처음에는 도대체 이 심시선이라는 여사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들 모두가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분의 삶을 자꾸만 추적하고, 하와이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러한 어른을 할머니로, 엄마로 두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챕터마다 '시선' 할머니의 짤막한 글이 등장하고, 단호하면서 힘 있는 그 글을 통해서 쉽지 않은 삶 속에서 아름답게, 긍정하며 살려고 했던 그녀의 에너지가 느껴져서 너무 좋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선'이 여성으로서 살기 힘들었을 그 시대에 야생화처럼 살아남아 진짜 내 할머니로 자랑스럽게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너무나 든든했다. 자녀-손주들도 모두 '시선'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음에도 온전히 '시선'의 에너지를 느끼며 살아간다. 애정 하는 그 어른을 다시 추억하기 위해 하와이까지 모두 날아가 각자가 생각하는 소중한 것들을 찾아 제삿날 제사상에 올리기로 했고, 그리고 당일 진짜 그렇게 올려진 제사상은 정말 기이한 제사상이 분명했다. 너무 웃겨서 소설 읽다가 소리 내서 웃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각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사상에 올릴 소중한 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작가님이 쓰면서 작가로서 너무 흥미로웠을 것 같았다. 다양한 얘기를 풀어낼 수 있는 판을 만들고 그 퍼즐을 맞춰가는 그 기분, 작은 성취감들을 하나씩 이뤄갔을 작가님의 어떤 공기를 느낀 것 같아, 나 또한 즐거웠다. 그리고 유쾌하지 만은 않은 시대의 이야기,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며 그 슬픔을 걸어가는 자의 세세한 감정, 그리고 지켜보는 가족들의 시선과 마음을 잠시나마 짐작하게 했다. 시선에게서 뻗어 나온 손주들 중 가장 첫째인 화수, 그녀는 성실하게 다니던 직장에서 어느 날, 그 회사에 앙심을 품은 어떤 미친놈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다. 간단한 사건의 설명을 읽었을 때 너무가 충격적이었고, 이 억울한 사람들이 겪어야 했을 그 잔인한 여정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같은 일을 당했던 동료들과 화수는 유산을 겪어야 했고, 우울증과 불면증, 과도한 수면, 다양한 형태의 가해자는 모를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화수는 가족들의 티 안 나는 보살핌을 받으며 같이 하와이로 향했다.
작가가 화수에 대해 쓴 묘사 또한 인상적.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
이랬던 우리 화수를 망가뜨리다니, 작가의 분노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대략 15-17명 정도가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하니, 소설의 맨 앞장에 심시선 가계도가 있었던 게 흥미로웠고, 그 많은 사람들은 역시나 다양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계속 읽다 보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 모든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여유를 선사하는, 아니 강요하는 듯했다. 이 사람이 왜 이럴 수밖에 없는지 변명 아닌 변명들을 다정하게 늘어놓는다. 사람을 온기 있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정하고 온기 있는 곳에 온전히 각자의 모습으로 서 있는 분위기가, 하와이의 심시선의 제사상이 내 온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희망이 있는 가족의 모습이었고, 복잡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의 마음으로 충분히 안아주는 곳이었다.
마지막 명혜(시선의 장녀, 하와이 제사를 기획-주도한 인물) 가 제사상 앞에서 훌라춤을 경건하게 추고 마무리했을 때 눈물이 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애정과 그리움, 그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심시선의 인생의 과정과 통찰, 그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후손들의 의지" 가 아름답게 표현된 장면이었다. 불안과 혐오의 시대에, 아직 이뤄지지 않은 화해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가족의 모습이다.
<시선으로부터>에서 만난 문장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난정) 원래도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우윤이 아팠던 시기와 겹쳤다. 대학병원의 대기시간은 길었고, 난정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아픈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서, 그러나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성격은 아니어서 머리를 통째로 다른 세계에 담가야만 했다. 끝없이 읽는 것은 난정이 찾은 자기 보호법이었다. (백 번 공감)
우윤이 낫고 나서도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우윤의 병이 재발할까 봐, 혹은 나쁜 일들이 딸을 덮칠까 봐 긴장을 놓지 못했다. 언제나 뭔가를 쥐어뜯고, 따지고, 몰아붙이고, 먼저 공격하고 싶었다. 대신 책을 읽는 걸 택했다. 소파에 길게 누워 닥치는 대로 읽어가며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키웠다. 죽을뻔했다 살아난 아이의 머리카락 아래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매일 샅샅이 검사하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아이가 아닌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낙관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책만 한 게 없었다.
지수는 화수와 세상 사이의 완충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공기가 든 포장재 같은 것, 인도와 도로 사이의 화단 같은 것, 자동차문에 붙은 스티로폼 범퍼 같은 것.
(우윤) Live a little (나는 좀 살아볼 거야)
누구에게나 공격성은 있지만, 그것이 희미한 사람과 모공에서 화약 냄새가 나는 사람들의 차이는 컸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 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뼈 맞음..)
온 가족이 모여 있을 때 입을 벌리고 있으면 공기 중에 가득한 단어들이 시리얼처럼 씹힐 것 같았다. 말들을 소화해내려면 버거웠고, 긴 가족 여행은 확실히 지쳤다.
화수에게 시선은 어른 그 자체였고, 그 어른이 무겁고 더러운 사슬 같은 것을 앞에서 끊어줘서 화수에게까지 오지 않도록 해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여겼던 듯했다.
그 가벼운 삶이, 무엇에든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경아는 집중력도 기억력도 다른 온갖 수행능력도 사실 산산조각 난 채 십수 년을 살아왔다. (엄마의 삶을 묘사 ㅠㅠ)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
(화수에 대한 묘사) 넘어지지 넘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게 화수였다. 균형감각이 좋았다. 온화하면서 단호한 성격. 과거를 돌아보되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되 틀어져도 유연한 태도, 살면서 만나는 누구와도 알맞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판단력, 일과 삶에 에너지를 배분하는 감각...이를테면 요새 유행하는 명상 앱의 차분한 목소리를 닮았던 것이다.
그 점은 나도 싫은데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한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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