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자를 위로하기, 편견을 깨기
구독자 님은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나요? 두 아이의 엄마인 저는 재작년부터 생일선물로 ‘시간’을 받고 있답니다. 1박 2일 혹은 2박 3일로 혼자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지요. 이번 생일에도 일, 육아, 살림이 없는 ‘자유’를 건네받고 홀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서울에 다녀왔어요. MBTI가 INFP인 저는 파워 P 성향이라 여행에서 정확한 일정을 짜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중에서도 식당은 ‘우연히 들어가서 먹고 맛있으면 거기가 내 맛집’이라는 신념(?!)으로 미리 검색해보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정에서 꼭 가보고 싶어 영업시간과 찾아가는 길을 철저히 숙지해둔 식당이 있었습니다. 오픈 시간에 맞춰 사람들이 줄을 서 있거나 재료가 소진되어 먹지 못하는 상황이 올까봐 알람까지 켜두고 일찌감치 일어났죠. 아침 8시, 저는 고도를 향해 갔습니다.
여행 중에는 평소보다 아침이라는 시간을 대하는 마음이 귀해져요. 여행지에서 아침엔 달리기를 하거나 가볍게 산책을 한 뒤에 아침식사를 챙겨 먹곤 해요.
숙소에서 제공되는 조식을 먹는 것도, 골목길 식당을 찾아가 아침밥을 먹는 것도 모두 좋겠죠. ‘조식’과 ‘아침밥’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긴 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른 듯 느껴져요. 제가 굳이 이른 아침부터 체크아웃하고 길을 헤맨 것은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였어요.
외국여행 중에는 아침밥 먹기가 쉬웠어요. 골목을 조금만 걸으면 빵, 치즈, 커피를 파는 카페, 간단한 국물요리를 파는 노점 등이 금방 눈에 띄었지요. 그런데 유독 한국의 여행지에서는 아침밥을 먹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곤 했어요. “아침식사 됩니다”라고 적힌 국밥집이나 기사식당 등을 제외하고는 일찍 문을 여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오키나와를 여행하던 중, 여행자의 아침식사를 위해 쌀국수를 만든다는 카페 soi에서 아침밥을 먹었어요. 혼자서 며칠째 낯선 길만 쏘다니느라 꽤나 지쳐 있던 제 마음을, 따끈한 국물이 덥혀주었지요. 저는 그 순간 사랑받고 보호받는 기분, 아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고도’에 가겠노라 마음먹은 이유도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듯해요. 고도 사장님들의 타깃 손님은 여행자가 아닐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한 시간표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아주 귀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지친 삶의 여행자를 수호하는 분들이구나, 하고요.
고도
주소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121-8, 1층
영업시간 08:00~14:00 (재료 소진 시 일찍 마감)
휴무일 화, 수
인스타그램 @godo.official
soi
주소 〒900-0065 沖縄県 那覇市 壺屋1丁目7−18
영업시간 11:30~14:30 (현재는 아침시간 영업은 하지 않는 듯해요!)
휴무일 토, 일
인스타그램 @soi_naha
고도에서 제가 고른 메뉴는 ‘제주레몬 냉이 호두 파스타’였습니다. 아침밥으로 먹기에 파스타는 조금 과한 느낌도 있었지만, 가장 궁금했던 메뉴를 먹어보기로 결정했지요. 레몬과 냉이, 호두의 향을 입 안 가득 머금고 우물거리다가 저는 알아차렸습니다.
‘파스타에 고기나 해산물을 넣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는 비건(vegan)이 아닙니다. 단지 내 몸이 더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최근에 고기 섭취를 조금씩 줄이고 끼니마다 채소를 챙겨 먹기 시작했을 뿐이지요. 그나마 『0원으로 사는 삶』 『날씨와 얼굴』 같은 책을 읽으며 먹는 일의 의미, 공장식 축산업과 동물권 등에 대한 약간의 각성이 일어나고 있던 때이긴 했습니다. 삼시세끼를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강박과 달콤한 음식에 대한 집착도 겨우 떨쳐내는 중이고요.
어떤 식사가 한 사람의 편견을 깼다면, 그 식사를 여러 사람과 나누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파스타를 요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기나 해산물을 주재료로 삼고, 그에 어울리는 채소를 조합하곤 했던 저는 그런 규율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지금껏 저를 가르치고 길들여온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023.03.17. 순천에서 민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