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어서 남 주는 독서노트 #1
수능 사회탐구를 역덕후의 정석 조합인 삼사윤리(국사, 근현대사, 세계사, 윤리와 사상)로 볼만큼 역사 과목을 좋아했었다. 그렇지만 역사 카페 같은데를 돌아다니다 보니 나보다 더 지독하게(?) 파고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선생님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진로가 없었던 직업선택의 폭 때문에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EBS 최태성 선생님은 언수외 공부하다가 짜증나면 머리를 정리하며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던 시간에 컴퓨터 화면에서 함께 했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역사의 쓸모’라는 책으로 찾아와주시니 반가운 마음에 내려받았다.
언뜻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들의 집합처럼 느껴진다. [역사/인물 이야기 - 일반론적인 해석 - 삶에 대한 적용] 이라는, 마치 큐티를 하는 듯한 관찰-해석-적용의 틀로 이야기가 풀어져나간다. 생산적 소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조금 낮은 진입장벽으로 접근할 수 있는 컨텐츠의 모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주로 정치사, 경제사를 중심으로 국가나 특정 집단의 흥망에 관심을 가졌고, 역사란 개인들의 선택의 바운더리를 제약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이라고 여겼다. 반면 작가(선생님이 더 익숙하지만, 여기서는 작가의 한 사람이니까...)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곧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 그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개인 역시 의미 있는 삶을 위한 고민을 계속하도록 배우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공부입니다. (26p)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작가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먼저 개인의 품위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선택의 힘이다. 가야만 할 길을 기꺼이 걸어가고, 내려와야 할 때는 주저없이 내려오는 선택. 그 선택은 곧 내 삶이 그냥 한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누군가에 의해 평가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이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후회없이 걸었던 이들을 생각한다면, 오늘 내가 걷는 한 걸음이 가벼운 한 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방향키를 놓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의 노력도 역사의 수레바퀴와 맞물려 순풍이 불어오듯 결실을 맺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33p)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면 그저 관성에 따라 선택하고 관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67p)
역사는 또한 내 삶 속에 의미 있는 통찰을 가져다주는 도구이다. 역사가 그냥 삶의 일반론적인 교훈을 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용성 또한 있다는 것. 비즈니스계에서 한 때 불었던 인문학 열풍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사실 여전히 그 유용함은 유효하다고 본다. 작가는 역사 속의 사건들을 통해 혁신, 성찰, 창조, 협상, 공감, 합리,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역사가 주는 통찰들을 이야기해준다. 이 통찰은 국가, 사회, 조직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유용한 적용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별히 구텐베르크와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준 ‘창조’의 파트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이며 그것을 돕는 기술이 곧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결국 지속 가능한 기업, 조직, 사람은 누군가의 불편함을 돕는 것으로부터 출발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 (75p)
마지막으로 역사는 지금 내 삶을 반추해보도록 하는 거울이고 등대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정도전, 장보고, 이회영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고민하도록 제안한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예순 넘어의 삶으로 보여주었던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이야기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을 가지고 이어내려온 경주 최부자댁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두 역사를 합치면 곧 “Think globally, Act locally”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 번의 인생을 그냥 살지 않고, 이 시대에 주어진 역사적 과제와, 개인의 삶의 목적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살아가되, 그 이상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지금 오늘, 내 주변의 이웃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그 목적을 이루어갈지를 고민하는 삶을 살자. 어쩌면 이 또한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과 조직, 사회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 시국에 좀 민감하니 이 뒤로는 글을 좀 줄이기로...) ‘역사는 이제 그만 취미로만 즐기자’라는 생각으로 점점 멀어졌던 역사였는데, 역사를 그저 유희로만 소비하지 않고 내 삶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생산적인 컨텐츠로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더욱 어떠한 선택이든 신중하게 되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리 작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삶은 내 자녀에겐 또 하나의 ‘역사’가 되는 것 같다.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기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삶의 끝자락에서 내 삶이 비록 작고 평범하고, 때론 무너지기도 했으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