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태초신 중의 하나로(티탄인 크로노스[Κρόνος]와는 다른 신), 그 단어 자체가 '시간'을 뜻한다.
정량적(일정 속도)이고 순차적(단방향: 과거->현재->미래)인 시간의 의미를 갖기에,
크로노스는 보통 형태가 따로 없는 무형(객관적)의 신으로 묘사되거나
형태가 있는 경우 긴 수염을 가진 늙은 현자의 모습(연대기적)으로 묘사된다.
영어의 '연대기(chronicle)', '연대학(chronology)' 등
정량적/산술적 시간과 관계 있는 단어들이 바로 이 크로노스에서 유래됐다.
한편 카이로스(Καιρός)는,
히오스의 비극 작가 이온에 따르면 제우스의 막내 아들로,
'기회(chance)'를 의미하는 καιρός를 신격화한 신이다.
그리고 이는 원래 '새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체험적이고, 주관적이며, 질적인 시간의 의미를 갖는다.
이 두 가지 용어로 볼 때,
베르그손이 주목한 진정한 시간의 의미는
후자인 '카이로스'에 가깝다.
[3] 크로노스적 삶
헌데 우리는 시간을 의식할 때 '시계'에 의존하게 되면서,
시간을 '카이로스'가 아닌 '크로노스'의 개념으로 바라보는게 익숙해졌다.
시계는 원형의 공간 속에서 일정한 속도로 바늘이 움직이는 '공간'적 도구이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공간화된 시간'은, 정량적이고 산술적이다.
또한 각각의 시간은 독립적이고 분절적(discrete)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은, 시간 앞에서 인간을 오만하게 그리고 동시에 수동적으로 만든다.
사실 '시간을 아껴 쓴다'라는 표현 자체가 오만한 것이다.
우리가 마치 시간 자체를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인 양 여기는 표현이지만,
시간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주어진 시간 안에, 우리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엄밀히 말하면 '시간을 아껴쓴다'라는 말의 실제 의미는,
동일 시간 안에 독립적이고 분절적인 일들을 이전보다 더욱 많이 처리한다라는 것을 뜻하며,
이로써 우리는 이러한 크로노스적 시간 속의 노예가 되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4] 카이로스적 삶
그러하기에 베르그손이 주목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처리했는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농밀하게 시간을 경험하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물론 시간을 농밀하게 경험하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베르그손은 이를 무책임하게 뭉뚱그리지 않고, 좀 더 많은 힌트들을 남긴다.
베르그손은 시간에 대한 '의식'을 '흐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는 베르그손의 절친한 동료이자 저명한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의식'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이를 '흐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유명한 용어는 문학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다.)
다시 말해, '시간'을 '의식'할 때도, 이를 분절적이고 정지된 시각이 아닌,
'흐름' 속에서 조명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베르그손이 '의식'을 '무의식'에 대비하여 고찰하는 대목에서,
이를 먼 과거나 미래를 모두 포괄한 광활한 흐름이 아닌,
'현재'에 근접한 흐름의 의식으로 그 범위를 확 좁힌다.
다시 말해, 의식에서 '현재'는 언제나 '근접 과거'와 '근접 미래'를 포함하는 일정한 지속을 점하고 있다.
한편, '근접 과거'의 의식은 방금 느낀 '감각'이며,
'근접 미래'의 의식은 '행동'에 대한 '정향(orientation)'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현재는 감각인 동시에 운동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을 농밀하게 경험한다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인 의미를 삶에 '새기는' 경험으로,
이와 관련한 '감각'과 '운동(추동)'을 농밀하게 하고
이러한 흐름을 보다 오랫동산 '지속'하는 질적 몰입을 의미한다.
[5] 나의 시간은?
"시간을 아껴 쓰면 삶이 더 나아질까요?"
베르그손이 또 다시 위의 질문을 받는다면,
“아니요. 진정한 시간은 ‘지속’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여전히 대답할 것이다.
동일 시간 안에 독립적이고 분절적인 일들을
이전보다 양적으로 더욱 많이 처리한다거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 보다는,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혹은 단 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