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생활의 주체권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있다
7년전에 영화인 앤티크에서 이다도시(?)가 이런 대사를 했다.
"먹기 위해서 헬스한다"
우리는 예쁜 옷을 입고 좋은 신발과 어울리는 안경을 쓰고 멋있게 단장을 한 후에 누군가의 앞에 간다.
혼자만의 공간에 있다면 잘 그러지 않는다.
우리는 한 단계의 손질한 존재를 "나"라고 한다.
나는 이미 벌써 나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았을 시에 굉장한 괴리감에 불안해하고 싫어한다. 부정한다.
맛있는 것을 먹는 그 자체를 즐겁게 여기지만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마냥
더 예쁜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멋진 것을 외친다.
의식주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줘야하는 유지 조건들이다.
산다면 필수 불가결적인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더 본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예쁜 옷을 입기 위해, 좋은 곳을 여행하기 위해서 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저 말은 TV광고에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지 않는가?
어느새 우리는 소비의 선택권이 아니라 더 본질인 생활의 주체권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있다.
이럴때일수록 근신하고 기민해야 한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