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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희 Nov 26. 2018

행복에도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순간의 행복에서 삶의 행복으로, <굿 라이프>

오늘은 회사가 바쁜 날이라 조금 일찍 지하철을 탔더니.... 사람이 많다 ㅠㅠ 우리 회사는 아침 출근이 약간 늦은 편인데, 다른 회사처럼 9시 출근이면 몇 년째 이렇게 다녔겠구나 싶다. 각자에게 허락된 면적이 좁아 책을 꺼낼 엄두를 못 내고 있자니, 아침 출근길을 왜 힘들어하는지 이유 하나가 더 실감된다. 편하게 서 있기도 힘든 이들에게 출근길에 책을 읽지 않고 폰만 들여다본다고 아쉬워할 수 있을까? 집중할 데가 없으니 아침부터 지루하고 피곤하네... 사소한 계기로 삶의 질을 생각하다 보니, 지난주에 읽은 <굿 라이프>의 내용이 떠오른다.


<프레임>은 읽는 사람이자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큰 쾌감을 준 책으로 기억된다. 단순명료한 개념을 풍부한 예시로 설명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보는 (말 그대로) 프레임 하나를 얻게 된 것이 독자로서 즐거움이라면, 편집자로서는 이렇게 내용 있고 글 잘 쓰는 국내저자라니! 하는 놀라움과 ‘그 편집자 계 탔네!’ 하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바람결에 접한 아쉬움이라면 이분이 다작 욕심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한 권 쓰셨다. <굿 라이프>.
예전에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그러고 보니 둘 다 21세기북스네)을 읽을 때 명쾌한 결론이 너무 마음에 들고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생물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들은 결정론 같은 면이 있지만, 어찌됐든 인간의 복잡성을 좀 소거해주는 명료함이 있어서 ‘행복’같이 머리 복잡해지는 주제도 ‘별거 아니네’ 생각하게 해준다. 그런데 내 사고체계가 딱 거기에서만 멈춰 있다 보니 어느 순간 ‘인생 별거 있어. 좋은 사람과 맛있는 거 먹으면 되지’ 하고 살기 시작하더란 말이다. 행복에 대한 관심이 큰 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한 권 읽고는 그걸로 나의 행복 노선을 잡아버린 성급함이 부른 참사였다. 서은국 교수님이 그러라고 그 책을 그렇게 쉽고 간결하게 쓴 것은 아니었을 텐데... 행복에 대한 인식의 문턱을 낮춘 건 좋은데, 이렇게만 해도 되나 싶던 차에 <굿 라이프>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좋은 선택이었다. 최인철 교수는 자신의 책이 “적어도 행복에 대한 균형감각은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내게 필요했던 것. 행복을 순간의 기분, 특히 쾌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행복’으로 시야를 넓힐 것을 제안하는 책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문장이 되려나.



“좋은 음식이 좋은 맛 이상인 것처럼, 삶의 행복도 순간의 행복 이상의 것”



책은 좋은 기분뿐 아니라 의미와 목적이 있는 삶, 삶의 품격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말한다. 1부에서는 특히 행복에 관한 우리의 오해를 바로잡는 데 많이 할애하는데, ‘행복’이라는 한자 ‘幸福’ 자체가 뭔가 요행수 같은 느낌을 줘서 오해를 산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삶에 만족하는 태도이며, 순간의 특정 느낌이 아닌 전체적인 만족감이다. 반드시 웃어야 행복인 것도 아니고, 남보다 더 행복해야 행복인 것도 아니다. 이와 관련해 유전율에 대한 실험이 흥미롭다. 행복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행복할 수 없을까?



행복의 유전율이 높다는 것은 행복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행복이 행복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행복보다 높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의 행복 수준 자체는 현재보다 높아질 수 있다. 변화 가능성은 유전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누구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올림픽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상대적 행복을 놓고 경쟁한다면 유전율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원할 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변화 가능성이지 유전율이 아니다.


이 외에도 행복에 관해 새겨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 사실 리뷰로 굳이 정리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며 태그할 페이지가 꽤 많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마다 귀를 접는 페이지가 다를 텐데, 경험에 소극적이고 현재스코어 일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은 나는 주로 다음의 대목이 울림이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의 영역에서 살면서 비교하지 않으려고 결심만 한다. 행복한 사람은 애초부터 비교가 일어나지 않는 경험의 영역에서 살아간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늘려 타인을 위협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늘려 관계를 강화한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소유를 통해 정체성 결핍을 은폐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정체성을 구축한다. 결정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돈으로 경험을 사서 삶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장식거리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우리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행복한 사람들의 삶의 기술을 ‘음미하기(savoring)’라고 한다. 음미하기란 소소한 현재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마음의 습관을 의미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가 유명해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인용되기 시작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 음미하기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 소소하게 음미할 것들은 이처럼 우리 일상 곳곳에 있다.”

“우리 연구는 쾌락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쾌락과 의미는 굿 라이프의 양대 산맥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의미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도 뭔가 인용만 하기보다 공식 같은 정리가 있으면 책을 잘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드니, 에필로그에서 말하는 굿 라이프의 3+7 시스템을 보자. 좋은 것이 많은 삶이 굿 라이프일 테고, 다음의 3가지 기분이 든다면 내가 지금 행복한가 보다(=좋은 것이 많구나) 하는 신호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1. 좋은 기분

2. 좋은 평가

3. 좋은 의미


그렇다면 ‘좋은’ 건 뭔가? 다음의 7가지다. 이것들이 많으면 굿 라이프.


1. 좋은 사람

2. 좋은 돈

3. 좋은 일

4. 좋은 시간

5. 좋은 건강

6. 좋은 자기(Self)

7. 좋은 프레임


그리고 다시 프롤로그. 앞에 미리 제시된 결론을 다시 읽는다.




“결론적으로 <굿 라이프>의 메시지는 균형과 확장이다.
재미와 의미, 순간과 삶, 유전과 환경, 성공과 행복, 현재와 미래, 자기 행복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에 대한 유연하고 확장된 인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맞닥뜨렸을 때의 영감과 경외감,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골똘한 관심도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행복에 이르는 길이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된다.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무거운 의미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야구장에 가는 것과 같은 가벼운 의미도 의미임을 아는 것 역시 의식의 확장을 가져온다. 균형과 확장이 가져다주는 의식의 자유로움을 통해 우리 모두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기원한다.”




예전에 회사 후배는 <무한도전>이 끝나면 우울했다고 했다. 월요일 회사 갈 생각 때문에. 남들은 그래도 일요일 <개콘>이 끝나야 그런다던데.... 이 친구의 괴로움은 얼마나 큰 것인가 짚어보다가 아득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 생활의 노동강도 또한 정점을 찍고 있던 때였고 상사와도 아주 안 좋았지만, 그래도 출근이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출판사 오고 나서 출근이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숙취나 몸살로 힘들었던 적은 있어도 ‘회사 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대체로 무던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 자체가 끔찍한 적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어서, 때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주 더러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어서... 이 셋 중 어디 하나에 속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으면 봐야 할 사람이 아주 지랄맞지 않는 한 출근길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아무 효능감도 배움도 느낄 수 없었던 첫 직장에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결국 넉 달 만에 아침에 머리를

감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침상 차리는 엄마에게 그만두겠다고 했다. 엄마도 얼른 그러라고 한 걸 보니 그때 내가 영 별로였던 모양.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낀다. 힘들어했던 후배에게나 고민하는 내게나, 일이란 의미의 영역에서 아주 중요한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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