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용기를.
꽉 움켜쥐고 있지만 완전한 내 것은 아닌 게 세상에 너무 많고, 그럼에도 놓지 못하고 여전히 집착하는 것들은 그것보다 더 많다. 그 많은 것들 사이에서 넘어지지 않고 ‘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 책 <포기하는 용기>가 말하는 포기의 지혜요, 용기다. 일전에 리뷰한 <소년>의 저자 이승욱 원장의 책이다.
그런데 가끔 포기하기엔 아쉬운 것들이 있다. 내게는 이 책이 그랬다. 5년 전에 낸 책인데, 내용이 정말 좋은데, 세월에 쓸려 잊힌 책이 되어버렸다. 나도 한동안 잊고 살다가, 지난여름 문득 다시 꺼내들어 찬찬히 읽었다. 이 책을 몰랐던 수많은 이들 중 몇몇에게라도 닿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정판으로 다듬어 다시 내놓았다. 편집 원칙은 하나, 어깨에 힘을 뺄 것.
개정판이라 편집하기는 한결 가볍겠거니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엇보다 요약이 어렵다. 5년 전에 초고를 받아 피드백을 하고 수정고를 받고, 퇴고한 원고를 받고, 그걸로 교열을 보고, 교정지에서 교정을 보고, 올해 다시 읽으며 수정하고, 수정고를 받고, 교정지에서 또 3교를 봤으니 열 번도 더 읽고 다듬은 글인데도 그렇다. 들여다볼수록 글이 깊어지기만 하고 좀처럼 짧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애써 만들었는데 브런치에 뭐라도 써봐야 하지 않나 고민하다, 5년 만에 다시 읽으며 가장 새롭게 와 닿았던 글을 전재하는 것으로 소개를 갈음할까 한다. 꼭지 제목을 정하면서 어깨에 힘을 빼기가 가장 어려웠던, 이 책의 에필로그다.
존재의 초라함을 안다는 것
뉴질랜드에서 일하다 귀국해서 대안학교 교감을 할 때였습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학교나 문화공동체가 여럿 함께 있어서 큰딸과 막내아들도 저와 함께 그 공동체에서 배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무렵, 당시 여덟 살이 채 안 된 아들이 찾아와 배고프다고 하기에 우리는 조금 이른 저녁을 먹으려고 구내식당에 가서 떡볶이며 라면 같은 분식을 시켰습니다. 늦여름이라 여전히 더웠고, 창으로 해가 들이쳐 우리는 조금 더워하며 음식을 먹었습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는 열심히 먹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라면 한 젓가락을 뜨며 문득 저는 ‘아, 나는 참 초라하다’라는 생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삶이 멈추는 감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정확히 만났습니다. 그것은 내 존재가 내 존재에게 언약한 계시였으며, 지나온 삶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정확한 나 자신의 앞과 뒤를 동시에 본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더 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한 줄의 이 생각이 당신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제게도 격한 감동의 순간은 아니었고 격정적인 깨달음의 경험도 아닌, 당연한 어떤 현상이 눈앞에 나타나듯 한 것이었기에 이것을 생동감 있게 묘사해내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존재의 초라함을, 아니 존재야말로 원래 초라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거역하고 자시고 할 수도 없음을, 저는 오차도 간극도 없이 그때부터 그 앎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제 삶을 돌이켜보니 버림과 포기의 연속이었고, 불안과 뒤척임의 세월이었습니다. 그 끝장이 ‘아, 나는 참 초라하다’였습니다. 초라한 제 삶이 저를 믿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후로 세상을 살다 보니, 인간을 믿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지만 인간을 점점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를 세상에 내모는 단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먼저 안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포기’는 우리 삶의 초라함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모두 초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초라한 인간을 연민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망치고 주변 사람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모두 과도하게 팽창된 자아를 가지려는 욕망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는 욕망을 포기합시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