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정희 Oct 26. 2020

탐험하는 글쓰기 혹은
치유하는 글쓰기

올리버 색스의 <온 더 무브>

중학교 때 겨울방학이면 보름쯤 외갓집에 갔다. 놀이 패턴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한 마을에 사는 동갑내기 오촌이모와는 소울메이트처럼 하루종일 수다를 떨었고, 사촌들과는 집안일을 비롯해 온갖 액티비티 활동을 했다. 고스톱도 배우고, 밤에는 동네 애들 다 모여서 김치서리하고... 결코 모범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놀이들을 섭렵하던 어느 날, 뒷산 너머 도산서원에 갔다. 산너머 몰래 들어가자는 꼼수였는데, 그럴 만한 루트가 없어서 결국 입장료를 냈다. 계획이 틀어진 걸 아쉬워하며 들어갔지만, 한겨울 을씨년스러운 도산서원은 의외로 꽤 운치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가을에는 편집 마감하면 한 번씩 쉬어가곤 하는데, 몇 주 전 일하다가 갑자기 “안동 갈래. 도산서원 볼 거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릴 때 멋모르고 갔던 그곳을 다시 가보고 싶었다. 다른 좋은 곳도 많겠지만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안동권씨라 안동 가는 거냐며 서윤이가 ‘근본투어’라고 농담했는데, 떠나며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올해는 유독 그러네. 봄에는 태어나서 꼬박 20년을 보냈던 전농동-답십리 일대를 다시 찾았는데, 그때도 이렇게 마음이 급했다. 내 속의 무엇이 자꾸 예전의 기억을 꺼내오는 걸까.



여행은 좋았다. 사전공부 이런 거 없이 다니면서 안내문을 읽는 게으른 여행이었지만 날씨가 좋았고, 일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고, 병산서원에서는 여러 번 ‘좋다’는 말이 나왔다.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돌아오니 꿈을 꾼 듯 아쉽다. 아이들 주려고 사온 타르트를 나눠먹고 여행길에 들고 갔던 <온 더 무브>를 마저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 책을 산 지는 몇 달 됐는데, 머리 쓸 각오가 되지 않아 집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재미있다. 하긴 올리버 색스 책은 내용이 어려운 거지 글이 어려운 건 아니니. 이렇게 촘촘하고, 이렇게 진솔하고 우아할 수 있다니 감탄하며 읽다가, 출간연도와 사망연도가 같은 걸 뒤늦게 알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긴, 마음이 복잡해진 건 꽤 초반부터긴 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밖에 없었고, 성적지향이나 약물중독이나 외부인으로서의 삶 등 온갖 개인적 결핍에 대해 1인칭으로 말하는 글은 흔하지 않으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연구와 치료와 자가치유가 글쓰기를 통해 통합되는 과정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글은 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서 나왔고, 그 시선은 몰개성한 집단으로 치부된 ‘환자’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게 진화하려 애쓰는 개인임을 알았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글쓰기에서 이방인의 삶을 위안받는 이야기꾼이었다. 덕분에 나 같은 사람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던 세계를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고. 


“이전까지 내가 쓴 책들은 다양한 신경질환 또는 ‘결손’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환자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템플을 비롯하여 내가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다룬 사람들에게는 ‘질환’이 그들 삶의 근본조건이었으며, 그것이 독창성이나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책에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그 주인공들 모두가 장애를 받아들일 비범한 방법을 발견했거나 창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곱 환자에게는 저마다 장애를보완하는 각자의 재능이 있었다.” <온 더 무브>


“그날 나는 톰에게 매번 자신과 자신이 사는 세계를 급조해내야 했던 기억상실증 환자 ‘톰슨 씨’에 관한 미발표 원고의 일부를 읽어주었다. 나는 그 글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 이야기, 내면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가 곧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하다고 썼다.” <온 더 무브>



읽고 있었기에 별 생각 없이 들고 갔던 <온 더 무브>를 다 읽고 나니, 여행길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앞쪽으로 가서 첫 페이지를 다시 폈다. “인생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키르케고르) 나도 중간 숨고르기가 필요했던 것 아닌가 싶다. 지금의 나를 만든 예전의 그곳들에서 결핍도 위안도 느껴가며. 


“1993년에는 새로운 모험이 시작되고 미크로네시아를 비롯하여 다른 많은 지역으로 향하는 새로운 모험과 여행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여정에 착수했다. 바로 나의 유년기를 지배했던 열정과 추억을 회상하고 돌아보는 일종의 정신적 시간여행이었다.” <온 더 무브>




나는 이야기꾼이다. 좋든 나쁘든, 그렇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향,
서사를 좋아하는 경향은 언어능력, 자의식,
자전기억(autobiographical memory)과 더불어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좌고우면 일희일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