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주는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지배한다
9 to 6 직장인을 위한 고전 읽기 04 헤로도토스의 <역사>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가?
예전에 역사가 헤카타이오스가 테베를 방문해 자신의 가계(家系)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 가문의 16대 선조는 신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곳의 제우스 신전 사제들은 그에게 내게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했다.
그들은 나를 큰 홀 안으로 데려가서 나무로 깎아 만든 인물상을 보여주면서 그 목상에 새겨진 숫자를 하나하나 셌다. 대사제들은 생전에 이곳에 자신의 모습을 본 따 목상을 세운다. 사제들은 내게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며 각각의 목상은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이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가장 최근에 죽은 사제의 목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목상을 한 바퀴 돌았다.
헤카타이오스가 자신의 가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16대 선조가 신이라고 주장하자 사제들은 자신들이 가계도를 어떻게 만들어서 물려주는지 말하면서 목상의 수를 일일이 셈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태어난다는 헤카타이오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345개나 되는 거대한 목상들 하나하나는 모두 ‘피로미스’에서 ‘피로미스’로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중 어느 하나도 영웅이나 신과는 상관이 없다면서. 피로미스는 그리스말로 인간이란 뜻이다.
(D. Grene, The History, 194p)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BC 484~BC425)가 쓴 <역사>의 한 대목입니다. 위의 글의 테베는 이집트의 도시입니다. 제가 꼽은 <역사>의 명장면입니다. 역시 인문학 정신을 나타내주는 탁월한 대목입니다. 헤로도토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매우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했습니다. 또한 숫자에도 강했지요. 그들은 범람하는 나일강을 다스리기 위해 땅 넓이를 측정하고 줄거나 늘어나는 면적을 계산했습니다. 여기에서 기하학이 출발했잖아요. 헤로도토스는 역사 2권에서 아이귑토스(=이집트)사람들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만난 민족들 가운데 가장 해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신도 우리처럼 질투하고 사랑하고 시기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이 가끔 무녀의 입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한다고 생각했지요. 특히 그리스인들은 신에 대한 맹신이 이집트보다 더 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경, 헤카타이오스라는 그리스 사람이 이집트를 방문했습니다. “우리 16대 선조는 신이다. 고로 나는 신의 후예다!”라고 뻥을 칩니다. 이 말을 듣고 이집트 사람은 대꾸도 안 합니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설정이기 때문이지요. 그저 선조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목상으로 만들어 놓은 방으로 데려갑니다. 책에는 “인간의 3세대가 100년이므로 340여 세대를 햇수로 따지면 11340년이 된다. 이집트 사제들에 따르면, 그동안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정말 통쾌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이며, 신학적 세계관에 대한 반격이지요. 인문정신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와 교제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당시 그리스 작가들은 신화와 역사를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고 시 형태로 써서 대중 앞에서 발표했습니다. 헤로도토스 역시 아테네에서 자신의 작품을 낭송하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역사> 낭송을 최고의 오락거리 중 하나로 삼았습니다. 그의 공연이 끝나면 동전이 수북이 쌓이곤 했다 네요. 헤로도토스는 베스트셀러작가이자 원맨쇼 공연자이자 배우였던 셈이지요.
더불어 그는 지리학자이자 여행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으며 역사적 사실을 후대를 위한 엄정한 기록으로 남긴 최초의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서술은 철저히 인문학적입니다. <역사>는 신화적 세계관과 온갖 미신이 풍미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역사라는 실증적 학문의 바탕을 제시한 진귀한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반복하면서 말이지요.
“도도네의 여사제들은 비둘기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제우스의 신탁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비둘기들이 어찌 사람의 말을 하겠는가?”
이런 실증적인 태도가 헤로도토스를 서양 역사의 아버지 반열에 올려 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그 당시 세계라고 알려진 거의 전 지역을 여행하고 눈으로 보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습니다. 물론 그의 주장 중에는 그리스에서 멀수록 야만인이라는 의식이 녹아 있습니다. 그의 책 <역사>는 박물지라고 할 만큼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각 민족과 종족의 관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아프리카 북부 지역인 리비에(=리비아) 지역에 살던 나사모네스 족에 대한 이야기 중 이런 게 있어요.
이 종족은 관습상 많은 아내를 거느리며 이들을 공유하고 있다. 남자는 누군가와 관계를 하고 싶으면 문 앞에 장대를 세워 놓는다. 나사모네스의 남자가 처음으로 혼례를 치를 때에는 초야에 신부가 손님들과 차례로 관계하는 풍습이 있다. 손님은 신부와 관계한 후 각각 집에서 가져온 선물을 신부에게 준다.
(박광순, <역사> 462p)
이해 안 되지요? 아니 그럼 친자확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아들놈이 다섯 살 쯤 됐을 때, 아무리 봐도 내 결혼식장에 왔던 친구 용팔이를 닮았으면 그냥 ‘용팔이 자식인가보다’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쩝. 하긴 리비에의 또 다른 종족인 아우세에스 족은 결혼을 하지 않고 여자들을 공유하면서 짐승처럼 내키는 대로 관계하는데,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백일 쯤 되었을 때 남자들이 다 모여서 그 아이와 제일 닮은 남자를 아빠로 인정한다고 하네요. 대박!
왜 이렇게 괴상한 이야기만 골랐나...하는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아테네는 강성해졌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와 평등이 단지 한 가지 측면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보여주었다. 아테네인들은 독재 하에 있을 때에는 전쟁에서 주변의 어느 국가도 이길 수 없었는데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자 다른 나라를 모두 제압해 버렸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그들은 압제 하에서는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 싸워봤자 독재자만 이롭기 때문이다. 자유인이 된 다음에는 각자 최선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자기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도시 국가 아테네는 주변 도시 국가들과 갈등하고 전쟁하면서 발전해 나갔습니다. 위 대목은 기원전 6세기경 아테네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테네가 주변 소국들과 경쟁하면서 강력해졌는데 그 이유가 독재자(참주)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민주적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의 인용문 뒤에 헤로도토스는 참주 지배 하의 도시 국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참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배하지 결코 시민의 이익을 위해 지배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참주들은 중요한 결정을 제멋대로 하며, 공공의 재화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때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기도 합니다. 자유민이라면 이런 참주를 쫓아내고 민주 체제를 옹호해야 마땅합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강자/강대국의 지배를 받으며 편히 사는 것 보다는 힘이 들어도 저항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부분을 낭독할 때, 얼마나 많은 시민이 귀 기울였으며 얼마나 많은 관심을 보였을지는 의문입니다. 다만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역시 헤로도토스의 외침이 절실한 걸 보면 갈 길이 멀다는 생각과 역사가 반복된다는 허무감이 교차합니다.
관련도서 <짧고 굵은 고전 읽기>(비즈니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