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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ie Oct 20. 2021

편하면 안 되나요?

태도의 문제라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틴 적이 별로 없다.


2008년, 25살 여름.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작은 시민단체에서는 6개월을 간신히 버티고 그만두었다. 당시엔 직속 상사의 갈굼, 이해할 수 없는 일처리, 맞지 않(다고 그땐 생각했다)는 조직생활, 출퇴근의 지겨움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십수년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냥 나한테 사회생활을 버텨내는 근육과 정신력이 1도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정리가 된다. 어쨌거나 첫 사회생활에서 6개월 만에 낙오했다는 트라우마는 이후 꽤나 집요하게, 삶의 여러 분야에서 나를 따라다녔다.


당시 오빠와 함께 살던 역삼동 빌라에서 백수로 지내는 동안에는 와우(월드 오브 워크래프트_블리자드의 MMORPG 게임)라는, 내 전부를 주고 싶은 매력적인 세상을 만나는 바람에 게임 폐인으로 몇 달을 살았다. 그러다가 언니, 오빠와 함께 소소한 온라인 악세사리 샵을 열었는데, 소자본 창업이 대개 그렇듯 얼마 못 가 소소하게 망했다. 할 수 없이 다시 게임이나 해야겠는데 우연히 학교 선배를 통해 어떤 청년 모임을 알게 되었다. 같이 토론도 하고 공부도 하고 프로젝트 같은 것들도 한다기에 재밌겠다 싶어서 한번 나가보았다. 그렇게 처음 나간 사무실에는 한 대학 교수님이 계셨고, 동아리방 놀러가듯 가벼운 옷차림과 마음으로 나온 내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셨는데 진지한 내용과 태도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그날 낯설고 작은 시민단체에 채용되었다. 2009년 7월 즈음이었다.


알고 보니 그 단체는 한 대학 교수가 동아리처럼 운영하고 있던 사모임이 외국의 한 싱크탱크와 MOU를 맺으면서 규모가 커져버리는 바람에 정식 단체가 되고자 인력을 구하던 중이었고, 마침 운 좋게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날의 모임에서는 원래 그들끼리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 이야기가 오갔는데 어차피 백수고 할일도 없던 터였던 나는 내용도 잘 모르면서 '시킬 일이 있다면 열심히 하겠다'하고 말했고, 그 부분이 의도치 않게 대표에게 어필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그랬다면 이후 7개월간 나의 근태와 정신상태에 그 역시 의도치 않은 실망을 안겨드렸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변명하자면 내가 지각을 밥 먹듯 하거나, 시킨 일을 제때 해내지 않거나 남에게 미루거나, 아무튼 그런 조직생활 빌런까진 아니었으나 뭐랄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정신상태로 매일 출근을 했던 것 같다. 사무직이 싫어서 전 직장을 그만뒀는데, 놀러 나왔다가 사무직에 채용되다니. 그렇다고 나라는 사람이 뭐 대단히 빛나는 인재일리가 없잖은가. 아무튼 난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도 뭐라도 하며 살아야했으니 꾸역꾸역 그곳을 다녔다.


반년 가량이 지난 그 해 어느 겨울날, 퇴근 후 사무실 근처의 호프집에서 대표가 말했다.


“윤정씨는... 뭐든 좀 편하게 가려고 하는 것 같아요.”


12년이 지난 현재, 나의 어떤 모습과 태도 때문에 대표가 저런 말까지 했을까 싶어 당시를 되도록 세세히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나의 2009년 하반기는 그저 ‘불행한 서울시민1’로 살았던 기억으로 뭉뚱그려진다. 아마 표정은 늘 어두웠을 것이고, 어깨는 항상 움츠러들어 있었겠지. 잠들기 전에는 ‘내일 아침에 안 깨어나도 별로 상관없겠다’라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우울한 생각에 빠졌다가 주말에는 정신없이 잠에만 빠져들었던 때. 온갖 것들이 오만 곳에 널려 있는 서울에 살면서도 그 좋은 걸 누릴 돈도, 여유도 없었고 누리는 방법도 몰랐던 26살.


“편하면 안 되나요?”

“안 되는 건 아니죠. 음...그렇죠. 안 되는 건 아닌데...”


해가 바뀌고 1월말,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7개월 만이었다.


집보다 피시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긴, 예전 생활로 돌아왔다. 한낮에 겨우 눈을 뜨면 대충 배를 채우고 집 근처 피시방으로 출근했다가 새벽녘에 돌아왔다.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내 평생 처음으로, 내 발로 금식기도원에 들어갔다. 2010년 1월의 일이다.

서울의 모 교회에서 운영하는, 경기도 어딘가에 있는 금식기도원. 첫날은 의지가 살아있어서였는지 잠들때까지 별로 배고프지 않았다. 둘째날, 점심무렵부터 슬슬 자괴감이 몰려왔다. 힘이 없으니 예배에 참석하기가 싫었고, 숙소에서 웅크리고 있자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건가 싶었다. 이렇게 마냥 굶는다고 무슨 삶의 진리를 깨달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후 내내 멍을 때리다 저녁 무렵, 마지막 차를 타고 나왔다. 강남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거리에서 팔던 치킨을 샀다. 길에서 바로 뜯어먹고 싶은 욕구를 꾸역꾸역 참고 겨우 집에 도착한 뒤, 식탁의자에 앉자마자 치킨을 조졌다. 만 하루동안의 금식은 그렇게 끝났고, 당장 삶의 다음 스텝이 보이지 않을 때, 이런 식의 기도나 수행은 별로 나와 맞는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일단은 귀향을 했다. 그리고 이후 1년 하고 1달 동안,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 영업 시간은 8시 오픈, 오후 10시 마감이었고 일요일은 쉬었다. 당장 하는 일이 없고, 삶의 다음 스텝이 보이지 않는...뭐 그런 비슷한 이유로 역시 집에 내려와 있던 오빠와 함께였다. 장사는 신통치 않았지만 14시간씩 가게를 열고 있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할만 했다. 남 눈치 볼 필요 없고, 서비스직이 제법 적성에 맞다 싶을 정도로 손님을 맞는 일은 즐거웠다. 가게를 꾸미고, 예쁜 식기를 마련하고, 음료를 예쁘게 만들어서 서빙하는 일도 즐거웠다. 간혹 진상도 있고 드라마에서나 보던 치정싸움이 내 눈앞에서 벌어진 적도 있지만 (실화로 손님들 사이에 “가정이 있는 남자한테 손을 대?!”라는 대사가 오갔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몸은 많이 힘들었다. 어느정도로 힘들었냐면, 오랫동안 키워서 이제 막 리치왕 잡는 레이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스펙을 갖춘 내 화법캐 채집본능을 더이상 플레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나보다 더 화려한 티어세트를 두르고 있던 오빠조차 와우를 슬슬 손에서 놓을 정도로 몸이 힘들었다. 그렇게 나는 와우를 접게 되었고, 이걸 경험으로 난 게임중독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게 되었다. 많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게임중독으로 고민하는데, 방법은 둘 뿐이다. 게임이 가능한 모든 종류의 매체를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몸이 죽도록 피곤하면 된다. 세상 쓰레기같은 게임 폐인도 피곤하면 못하거든. 아, 이런 노하우는 돈 받고 강의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결혼을 했다. 그 즈음 수의학과로의 편입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신혼 시절에는 교대역에 있는 편입학원을 다녔다. 그해 말 편입시험에서 경상대학교 대기 3번을 받았고, 보통 6~7번까지 대기가 빠지던 전례를 감안해 합격이라 확신하고는 진주의 경상대 앞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하고 며칠 후, 최종 합격 결과를 확인했는데 대기 2번이었다. 한 명밖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허탈하고 이사까지 온 내가 우스웠지만 대기 1번을 받았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 번 더 도전하면 될거다, 생각하며 공부에 열중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중학교 3학년 이후 처음이다.


그런데 임신을 해버렸다. 그제야 합격하고 나서 결혼하라던,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개무시했던 과거의 내가 너무 후회되었다. 초고수위의 입덧 덕분에 공부는 커녕 핸드폰 문자조차 읽지 못했기에 일단은 공부를 접었다. 나중에 다시 해야지. 나중은 개뿔. 육아가 시작되고 나중이란 없었다. 그리고 둘째까지 생겼다.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다. 그렇게 수의대 편입은 내 인생에서 퇴장했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한번씩 생각한다. 그 해에 시험을 칠 수 있었다면, 합격하지 않았을까? 진주에서 공부하는 동안 같이 수의대 편입에 도전하던 경상대 학생친구 둘이랑 스터디를 했었는데, 내가 스터디에서 빠지면서 스터디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버려 늘 미안한 마음을 지고 살았다. 그런데 그 중 한명이 기어이 편입에 성공했다. 함께 스터디 하던 게 2012년이니까, 그 친구는 그때까지 장장 6년 동안 회사일을 병행하면서 편입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 친구에게서 합격 소식을 듣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진심으로 그 친구의 무탈한 학교 생활과, 멋진 수의사로서의 데뷔를 바란다.


전업 주부로 육아에 전념한지 5년째던 2017년 3월, 평생 한번도 해본적 없는 분야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영어 특강 강사. 음악, 미술, 체육, 코딩 등의 다른 특강 강사들이 그러하듯 여기 저기 옮겨다니며 수업을 하고 수업당 페이를 받는 직업이다. 그 이전 해 10월 즈음, 이사갈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구입했는데 가진 돈이라곤 천만원밖에 없던지라 대출을 엄청나게 받게 되면서 얼마라도 벌어야 한다는 압박이 생겼다. 그래도 돈 내면서 대학 다녀 배운 게 영어니, 이쪽으로 알아보다 어린이집 특강 선생이라는 영역을 알게 되었는데 일하는 시간과 페이가 괜찮았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일이니 오전 11시~4시 사이에 일이 끝나고, 주말과 휴일은 다 쉬고 심지어 일주일짜리 방학이 1년에 두 번이나 있다! 그래서인지 동료 선생님들 중 다수가 어린 아이들이 있는 엄마들이다. 그렇게 시작했다. 둘째 연아가 5개월 무렵이었을 때다.


시작할 땐 몰랐다. 어린이집 영어 선생이라는 일이, 영어실력보다 쇼맨십이 오만배는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물론 매번 대단히 흥미로운 수업을 할 필요는 없으나, 나 스스로가 재미없는 걸 극혐하기에 재미없는 내 수업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카드 한장, 교구 하나 꺼낼 때도 아이들의 관심을 끌면서도 수업과 걸맞는 멘트를 날리고 아이들 앞에서 오버액션은 기본, 산만한 아이들은 세련되고도 확실하게 잡으면서 수업의 핵심은 집중력있게 전달해서 결과를 내야 한다. 많게는 한반에 22명까지 앉아 있는 4~7세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려웠다. 어떻게 몇년을 버틴 끝에 신입 티는 벗었지만, 여전히 매번 색다르게 같은 내용을 제시하는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똑같은 액티비티를 해도, 어떤 반에서는 대박났는데 어떤 반에서는 실패한다. 실패했다는 사실은 아이들의 눈빛이 산만해지고 거침없이 날아오는 팩폭("선생님 재미없어요." "언제끝나요?")으로 모를 수가 없다. 그쯤 되면 다 접고 신나는 노래를 틀거나, 적당히 굿바이 송으로 마무리하고는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라며 인사하는데 담임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못 보는 정도의 자괴감이 밀려온다. 동료 선생님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그러고 있다고 한다. 흑흑.


만들어야 하는 교구의 양도 엄청났다. 처음이니까 당연하지만, 처음이라도 필요한건 다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집에 프린터/스캐너 복합기와 코팅 기계를 들였다. 일이 없는 날이면 하루종일 글루건을 들고 교구를 만들고, 애들을 재우고 난 밤에는 가위를 들고 코팅 교구를 잘랐다. 내년엔 훨씬 편해지겠지, 생각하며 일년이 지났는데 올해 새로운 교재가 대거 들어왔다. 새로운 교재에 따른 새로운 교구를 만드느라 똑같이 글루건과 가위를 놓는 날이 없다. 그러고보니 이 바닥이 그랬다. 몇년 하면 교재가 바뀐다. 몇년까지도 아니고, 일년만에 사라지는 교재도 있다. 난 예나 지금이나 편하게 일하고 싶은 사람이니 어지간하면 했던 걸 계속 하고 싶지만 이건 내 맘대로 되지가 않는다.


그렇게 일년, 일년 버텼는데 어느덧 4년차가 되어 무려 신입 선생님들을 교육하는 팀장이 되었다. 이것도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대단히 수업을 잘하고 재능이 있어서가 절대 아니다. 난 이 대목에선 늘, 어릴 때 읽었던 신화 이야기 중에 저승의 강을 건너주는 뱃사공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날 새로 저승에 온 영혼이 노 젓는 일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하니 뱃사공이 그럼 한번 저어보라고 노를 건네준다. 배가 강 기슭에 닿는 순간 원래 뱃사공은 훌쩍 배에서 뛰어내려 달아나며 외친다. "다음 영혼에게 노를 건네주기 전까진 당신이 영원히 그 일을 해야 하오!"


어쩌다 잘못 걸려들었고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팀장을 그만 둘 수가 없다 뭐 이런 얘기다. 다만 사무실이 한 시간 거리라 좀 멀고, 무급 시간 외 노동에 가까워서 그렇지 선생님들 교육하는 일이 싫은 건 아니다. 팀장 하면서 선생님들과의 유대도 생기고 같이 일하는 기분도 들어서 좋은 점도 있다.


요즘 들어, 어쩌면 나는 무조건 편한 길만 찾는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20대의 나는 무엇보다 목적이 없었고, 이 조직에서 일을 잘 해서 그 다음에 뭘 이뤄야지 하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기만도 버거웠고 내가 배운 것, 내가 가진 것은 한없이 보잘것없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그랬으니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 위해 어떻게든 편하게 일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그래야 하루라도 더 하니까. 그랬던 내가 남들 다 안 하려는 일을 하나 더 맡고, 불만이야 있지만 그래도 좋은 점을 찾아 일을 계속 하고, 수업을 더 잘하고 싶어서 연구하고 연습하고, 무엇보다 같은 직종에서 무려 4년차 경력직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10년, 15년씩 근속하는 남들이 보기엔 참 우스운 기록이지만 내게는 인생 최초 타이틀이다.


아직 인생 대부분의 분야에서 내 한 몸 편하도록 요령있게 적당히 살고 있긴 하지만, 내가 그렇지 뭐 하고 한때 체념했던 나의 한 부분이 사실 그 안에 가능성이 있었고, 조금씩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요즘이다.


편하게 일하면 안 되나?


당연히 그래도 되지. 일이 어느 정도 편한 부분이 있어야 오래 할 수 있는 건 국룰이다. 지금 하는 영어 강사 일도, 했던 교재를 또 하면 편하기도 하지만 두번째 할 때는 수업을 반드시 더 잘하게 된다. 그러니 편하면 안 된다는 건 분명 틀린 명제이나,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는 태도가 전부라는 명제에 동의한다. 25살의 나에겐 진정성 있는 태도란 것 자체가 전무했고, 그런 개념조차 없었으니 그렇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 하나를 처리할 때도 (부탁받은 물건을 전달해 준다거나, 택배를 받고 나서 잘 받았다고 메시지를 보낸다거나 하는) 태도는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신입 선생님들을 보아도, 신입이니 당연히 처음부터 잘 할 수 없으니 수업 숙련이 낮은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 더 나아지려고 하는 열심, 지시받은 내용은 숙지해오는 태도에서 결국 갈리는 걸 본다. 이 부분에서 개선이 안 되는 선생님은 일찌감치 교육 중에 그만두거나, 어찌어찌 일은 계속해도 어린이집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와 결국 그만두게 되는 걸 본다.


지난  나의 미숙함은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때의  애초에 틀려먹었던  아니고, 제대로  태도를 배우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렇게  십수년 전의 서툴렀던 나를 조금 이해해 주고,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그대로 떠나버리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 예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었던 나를 조금 칭찬해주려 한다.



라고 이 글을 마무리한게 작년 봄이다.

약 일년 반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직업이 두 번 바뀌었고 지금은 인생 어느 때보다 근면 성실한 요식업 종사자가 돼버렸다.


안물안궁 내 이야기 시즌2도 곧 올려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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