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메리카 표류기 :: 배낭여행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를 생각하며 아르헨티나를 만나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3월은 추워지고 있다. 그간 여름을 찾아서 돌아다녔던 시간이 지나가고 한국의 봄 시절, 나는 지구 남반구 어디쯤에선가 추위를 맞이하고 있다. 포르투갈어가 끝나고 Hola!올라! 하고 인사하는 스페인어권 나라가 시작된다.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을 때 전씨를 만났다. 5:5 가르마를 한 약간 긴 머리에 살집이 있는 내 머릿속 전형적 중국 부호 같은 이 아저씨는 한 달간 휴가를 쓰고 남미 여행을 하러 온 40대 회사원이다. 놀랍게도 초록색 한국 여권을 가진 한국 사람이다. 수더분한 전씨는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고생 끝에 찾은 가장 저렴한 숙소가 1박 20만 원이었다며 한탄한다. 그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아야 하는 바쁜 일정을 가지고 있다. 그 여행은 어딘가 막무가내 식이다. 몇 가지 계획 그리고 한 달의 시간 출국/입국 비행기 티켓, 그것이 다이다. 시간이 없는데 계획은 허술하다.
젊었을 때는 시간은 많은데 자금이 없고, 나이가 들어서는 쓸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다 하지 않았나. 그는 사표를 내기 직전까지 가서야 그런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저 남미란 땅이 궁금해 무작정 떠나온 전씨는 왕년에 자칭 자유로운 배낭여행자인데 남미 땅에서는 그저 다른 나라 언어도 잘 못하는 대책 없는 아저씨다. 국경을 넘자마자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로 달려가려던 나는 이과수 폭포의 아르헨티나 쪽도 보기로 결정한다. 엉성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 첫날 밤 환전상을 찾아 비 오는 밤을 헤매고 길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고 환전이 가능하냐며 어설픈 스페인어로 묻고 다닌다. 국경지대에 산다는 이유로 꽤 많은 사람들이 환전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환전상이 거의 눈에 띄지 않자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될 판이다.
비가 오는 밤 “Cambio깜비오!”(환전!) 외치며 길거리를 헤맨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어서 이상한 가게 구석 무슨 잡다한 물건을 파는 사람에게 환전을 괜찮은 가격에 할 수 있다. 무계획도 의지를 가지면 괜찮을 수 있다. 우리는 맛있는 피자를 먹으며 고생한 몸과 마음을 달랜다. 오랜만에 신나는 한국어 수다시간이다.
이과수의 장엄함. 브라질에서 멀찍이 바라보던 풍경이 가까이에서 엄청난 에너지로 다가온다. 악마의 목구멍을 응시하면서 그 하염없음이, 그 어마어마 한 쏟아져 내리는 에너지에, 자연의 흐름에 숭고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슬픔 따위가 쓸려 내려온다. 날이 흐리고 진흙탕으로 번져 흙물이었던 폭포는 전에 보았던 폭포의 전형성을 뛰어넘어 그 하나의 독자성과 강렬한 원시성으로 뇌리에 새겨진다. 1000년, 2000년 혹은 더 오래 있었을 자연의 역사를 듣는다. 자연 그대로인 저 폭포수가 가장 지구의 원초인 것으로 다가와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밝혀준다. 사람들은 탄성을 지르거나 그 거대함에 압도되어 침묵으로 응시한다. 너무 엄청난 것 앞에 서면 그것의 표면적 아름다움을 뛰어넘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어떤 것은 직접 보지 않고 표현될 수 없다.
오후가 저물어간다. 아르헨티나의 땅은 고동색으로 물들어 간다. 하루의 마지막 열기를 불태우고 있는 태양의 색은 더 화려하고 갈 주황 지붕과 벽돌이 고급스럽게 어우러진다. 2층 버스를 타고 탱고의 고장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고요한 버스에서 여행, 삶, 한국(고향)을 생각한다. 여행의 마지막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면 마음속 한 켠에 여행의 끝에 대한 고민이 싹튼다. 절대 시간이 많다고 더 많은 것을 배운 여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단을 내리고 시작하는 것이 힘들고 중요한 만큼 그것을 정리하고 돌아갈 때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아직 결정적인 깨달음이(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오지 않았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순진하고도 어리석게도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인생이 통째로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그런 몽상이 아직도 나를 이끌고 있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이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끝없는 지평선, 새 아침이 밝아온다. 또 지극히 교육된 ‘현실’이 타협점을 제시하며 스물스물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자본, 안정, 가족, 미래 같은 것, 나는 이 길 위에서 하나도 변하지 못했나 보다. 이과수 폭포에 댐을 지을 것 같은 효율성이 몰려나와 나를 삼키려 든다. 계획 없이 과감하게 여행하면서도 계획 없는 고국에서의 미래가 아주 뿌옇고 막연하게 느껴진다. 생각의 시간은 충분히 길지도 깊지도 못했고 아직도 어디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다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다.
우리는 이과수 폭포의 거대함을 다 씻어내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버스에 올라 몇 백 키로를 달리며 밤을 보낸다. 불편한 밤에 익숙해진다. 노란 우비를 덮고 얼굴이 다 붓도록, 태양의 기운도 그저 기온으로 받아 들인 채 꿈속을 헤매다 깬다. 정체불명의 차 내에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피곤한 장거리 버스의 아침을 깨우며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 도착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Buenos Aires/Good air
도착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햇빛은 가득하지만 한국의 11월만큼이나 춥다. 물에 빠진 생쥐인 채로 하룻밤을 나고 그 정글을 헤매던 옷들을 죄다 갈아입고 대도시의 풍경에 빠진다. 사람들은 긴 팔을 입고 도시의 아침은 생각보다 차분하다. 그곳에서 전씨는 한국인 게스트하우스로 나는 카우치서핑을 통해 알게 된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스티앙의 집으로 각자의 발길을 돌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외곽지역에 사는 크리스티앙은 콜롬비아 사람이다. 두꺼운 반 테 안경 너머로 세상을 보고 코가 약간 막힌듯한 소리로 말한다. 비건(vegan:채식주의자)이 되어 자기 신념을 생활로 만들고, 그래픽 디자인, 피아노, 플루트를 이용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예술가다. 수많은 통제되지 않는 폭력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동네 근처에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그저 일상이 되기 시작하고, 그것에 대한 슬픔조차도 비극이 되지 않을 때 그는 그의 고향 칼리Cali, Colombia를 떠나야겠다고 다짐했다.
콜롬비아 칼리 고향 생활을 정리하고 더 나은 자유의 환경을 찾아 아르헨티나로 왔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안락한 환경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삶을 다시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없이 하나씩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 나갔다. 게스트 하우스 등을 전전하는 등 그의 타국 일상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 좋게 지인을 통해 빈 집을 얻게 되었다. 이 2층 집은 거실과 커다란 방,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2층에 다락방과 창고 그리고 옥상이 있다. 정갈한 집은 약간 휑하지만 고양이 한 마리와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기에 안성맞춤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꽤나 안정된 삶을 얻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 음악과 낭만 그리고 더 의미 있고 도전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려 노력한다.
하루는 그의 집 옥상에서 여러 남미의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연다. 그는 콩고기를 만들어 바비큐 파티를 즐긴다. 고기를 느리게 숯불로 구워내는 아르헨티나의 바비큐 방법 아사도Asado에 따라 요리한다. 그 날 에콰도르,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친구들이 한데 모여 (그들은 대부분 학비가 저렴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낭만을 즐긴다. 남미 사람들은 마치 한 대륙을 중심으로 한 형제들 같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별이 아름다운 밤 풍성하고 자유로움이 넘친다. 다만 내게 스페인어만이 그 모든 것을 더 풍성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일 뿐.
문화적으로 풍성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시장에 나와 자신들의 재능을 표현한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전동차 안 악기를 짊어진 사람들마다 멋진 연주를 펼친다. 주말광장에서는 수 많은 시장이 열리고, 마술사, 연기자, 음악가가 어디든 있다. 너른 잔디밭 공원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누워서 햇살과 문화 예술을 즐긴다. 대단하고 멋진 극장 안에서 사고 팔리거나 정제되어야 하는 ‘고급’ 딱지 붙인 것을 넘어 모두가 향유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오늘은 주부이지만 내일은 예술가인 것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다. 급할 것도 없고 쫓길 것도 없다. 도시는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유럽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일요 시장에 방문하면 오래된 건축물 사이로 상점이 무수하다. 갖가지 물건들, 길거리 탱고 공연, 먹거리가 섞여 가족적이고 밝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골동품이 있고, 상점 주인의 개성에 따라 펼쳐져 있다. 모두의 자유스러움이 존중되는 곳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낭만을 즐기는 것은 일상이다.
H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