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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칸나 Dec 04. 2015

야생 고양이 #44 <페루> 신비의 세계

남아메리카 표류기 :: 배낭여행

그녀

아주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난다. 마추픽추Machu Picchu의 여운이 가시기 전 쿠스코Cusco에 다시 돌아와 숙소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K씨다. 일단 오랜만에 한국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반갑다. 마른 체구, 긴 곱슬머리에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알게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여행 이야기를 술술 꺼낸다. 맥주 한잔 하면서 각자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둔다.


그 동안 만나 온 많은 아시아 장기 배낭여행자의 공통된 특징은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맛 집 방문 후 빠르게 움직이며 여러 장소와 나라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페루의 피삭Pisac이라는 작은 마을에 한 달을 지내다가 이제야 쿠스코로 나온, 여행을 음미하는 법을 아는 느린 고수 여행자이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피삭 마을에 가기를 권한다.


피삭Pisac

쿠스코 외곽 지역을 따라 따라 잉카의 유적이 남아있고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라고 이름 붙여진 여러 마을이 있다. 피삭은 잉카의 유적이 흩뿌려져 있는 그 변방 작은 마을 중 하나이다. 좁은 골목 골목으로 작은 시장과 식당, 숙소가 있어 조용한 여행자들이 낭만을 찾아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피삭뒷동네 산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해먹고 자유생활을 즐기는 히피 여행자들도 있다.


노란 줄무늬 빨간 체육복,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걸어 다닌다. 검은 소가 똥을 싼다. 시골 자락의 묘미는 만날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별 대단할 것도 없는 익명의 방문자로 남겠지만 그래도 산 넘고 바다 건너 다른 사람 사는 동네 구경은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린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골목 길에서 더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생기는 경우의 수가 더 많았다. 여유롭게 피삭을 거닐며 집 동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유칼립투스

페루에서 흔하게 보아온 나무가 익히 들어본 유칼립투스 나무란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것의 유년기와 성년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린 나무는 마치 외계의 것 같이 흐린 청록색빛깔 연한 줄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성장한 유칼립투스는 단단하고 곧게 그러나 그 신비로운 색은 잃은 채 커다란 풍채를 가지고 있다. 신비로운 것은 그 두 개의 다른 나무가  하나라는 것. 어떤 과정을 거쳐 나무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걸까. 그저 겉모습일뿐 본질은 같은 건가. 무엇이 그 변화를 만들어 내는 걸까. 어제와 오늘이 같고 다르듯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유칼립투스 나무를 지나치며 산을 오른다. 그 꼭대기 피삭의 유적은 마치 얼마 전에 그들이 살다 떠난 듯이 날 것 같다. 그 자주색 성은 이 잉카의 대지에서 하늘을 찬양하던 지난날을 품고 있다. 가지고 있던 선입견의 경계가 흩어지면서 지난 세월의 그들이 멀지 않게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변화한 그 나무처럼 잉카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고 이제 우리가 온 것이다.



흘려 보내야 할 것은 흘려 보내야 한다. 과거를 다 껴안고 현재라는 시간 변화에 부적응하고 있다. 일렬로 지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 개념 이해에 절뚝거리고 있다. 얄궂은 기억의 파편을 영원과 같이 냉동 보관하 아득바득이다. 옛 것들의 구렁텅이 순서가 뒤죽박죽인 불온전하고 제멋대로인 기억들뿐이다. 흐르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서툴고 신비한 유년기를 거쳐 모진 세월이 쌓이면 완전히 다른 종류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된다. 유칼립투스 나무처럼.


그곳 잉카 사람들의 흔적과 자연을 보며 오래 머물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자 산 비탈을 비집고 내려온다. 두려움을 느낀다. 더워서 땀이 나는데 식은 땀같이 느껴진다. 저녁 무렵 산은 또 다른 색을 가지고 있다. 다행히 유적에서 일을 하던 사람이 앞에 가고 있어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간다. 그러나 다리를 접지른다. 절뚝이는 발로 겨우 산을 다 내려와 안도하며 밤하늘 별을 보았다.


나를 태양으로 데려가려던 거대한 불사조가 있었다. 나는 인간이 아닌 직감적, 원초적인 동물 같은 에너지였다. 아주 작은 장난꾸러기 같은 나는 대단히 큰 존재가 되지 못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저 모두가 모두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진다. 더 이상 내게 익숙했던 내 육체의 부분들이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된다. 모든 것이 더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몸과 행동은 생각 위에 있고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깊은 행복의 상태, 그러나 미처 다 애도되지 못한 죽은 영혼을 슬퍼해야 했다.

그 밤 한 여자가 촛불 위에서 황홀하게 춤을 췄다. 나는 환상의 동물이 되어 울고 웃었고, 삶의 모든 규칙과 얄궂은 감정들은 너무나 하잘것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우주 아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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