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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차니피디 Oct 30. 2022

포항‘시민’ 제철소

포항제철소 정상 가동을 기원합니다.

 포항제철소가 멈췄다. 포항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다. 태풍이 동해로 빠져나간 아침에 TV 뉴스에는 불타고 있는 제철소가 나왔다. ‘쾅’하는 폭발음도 몇 차례 있었다는데 폭풍우를 뚫고 침투한 북한 잠수정의 공격이 아닌지 의심도 들었다. 회사 단체 카톡방에 현장 사진들이 올라왔다. 제철동 소망아파트가 잠기고 주차된 차량은 누런 흙탕물에 둥둥 떠다녔다. 맞은편 인덕동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는 자동차를 빼내려던 주민이 7명이나 숨졌고, 엄마를 따라간 중학생 아들의 사망 소식은 안타까웠다.

 포항은 자주 태풍의 길목에 선다. 2년 전 ‘마이삭’은 강풍을 동반해 바닷속에서 수 톤짜리 바위를 육지로 들어 올렸다. 이번 ‘힌남노’는 569mm 최고 강수를 기록했고, 시간당 101mm 집중호우를 뿌렸다. 오어사부터 영일만에 이르는 10km 구간의 냉천이 범람했다. 포항 지진의 충격이 사라질 무렵 이번에는 태풍으로 인명과 재산피해를 크게 입었다. 포항제철소는 준공 이후 처음으로 공장 대부분이 물에 잠기고 용광로까지 멈췄다. 피해 추산액만 수조 원에 이른다. 천재지변과 인간의 개발 손길이 어우러져 막대한 피해를 키웠다. 포항이 살기에 좋은 도시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내가 부끄럽다. 어쩌면 다음은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방문하고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아픔을 덜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얼마 전 국정감사에는 포항시장과 포스코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태풍 피해 책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정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하는 것임을 위정자들만 모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포항제철소 본사 건물도 침수로 정전되었다. 체인지업그라운드에 재난대응팀이 꾸려졌다. 긴급하게 움직인 사람들은 설비 담당자들이었다. 조기에 가동하려면 전자장비를 살려야 한다. 흙탕물에 젖으면 수리해도 정상 작동을 보장할 수 없다. 핵심 장치들은 국내에서 찾지 못하면 해외에서도 주문했다. 어떤 것은 아예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제철소가 멈춘 것은 큰 위기지만, 이것을 기회로 설비를 최신화하고 공정을 개선하면 어떨까. 분주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대응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나는 수해복구에 참여했다. 형산강을 건너 포스코와 현대제철 사이를 지나며 곳곳에서 피해를 목격했다. 울타리가 뜯기고 나뭇가지와 쓰레기로 뒤엉켰다. 트렁크 쪽이 하늘로 향한 자동차가 가로수에 거꾸로 매달렸다. 침수된 자동차 위로 창문이 깨진 자동차가 얹혀 있었다. 침수차량만 어림잡아도 수백 대였다. 소망아파트 부근 상가에서 해병대 병사들은 토사를 씻어내고 주민들은 젖은 물건을 살려보려 애쓰고 있었다. 심각한 피해 현장을 기록하려 사진을 찍는 것조차 미안한 마음이었다. 추석 연휴도 수해복구는 이어졌다. 서울과 광양에서도 봉사자들이 찾아왔고 포항공대 학생들도 힘을 보탰다.

 열연공장 앞에 버스가 도착했다. 남녀 직원 20명이 모였다. 방진복을 입고 장화를 신었다. 현장 담당자에게 안전교육과 작업 절차 교육을 받았다. 안전모자, 마스크와 보안경을 쓰고 공장으로 들어갔다. 슬라브를 생산하는 큰 설비들이 높이 서 있다. 얼마 전까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을 수백 개의 롤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설비 아래에 들어가 수리하는 협력사 직원도 보였다. 안전 통로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문 앞에 도착했다. 눈높이 정도에 흙과 부유물이 말라서 만들어진 침수선이 뚜렷하게 보였다. 대략 160cm까지 잠겼다. 물은 지하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서 차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이 제철소를 덮쳤을까? 열연공장은 지하 15미터짜리 물웅덩이로 변했다. 토사에 막혀 양수기로 물을 퍼내는 작업도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난간도 흙과 나뭇가지 부유물이 묻어있었다. 바닥에 도착했다. 마스크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쾨쾨한 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두통이나 구토가 나오면 빨리 지상으로 올라오라는 안전교육이 떠올랐다. ‘안전제일’, ‘취급 주의’ 문구에는 설비에서 나온 검은 기름과 부유물이 뒤섞여 묻어있었다. 좁은 통로를 따라 몇 명씩 작업에 투입되었다. 나와 다섯 명의 작업자는 부품 창고에 들어갔다. 천장 석고보드는 축 처졌고 군데군데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20년 전에 설치한 에어컨에는 습기만 가득했다. 감전 사고를 예방하려 전기를 끊었고, 임시 조명과 케이블이 급하게 설치된 것 같다.

 처참한 광경에 말을 잊었다. 복구작업이 막막했다. 바닥과 선반에 널브러진 부품은 사용할 수 없어 보였다. 20리터 세척액과 걸레용으로 낡은 옷 몇 포대를 받았다. 바닥 곳곳에 진흙이 남아있었다. 축축한 바닥에 걸레를 깔고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유압 게이지 비닐 포장을 뜯어내니 흙탕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잘 닦으면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하나씩 정성을 다했다. 십여 개를 닦으니 40분이 지났다. 안전을 위해 휴식 시간을 지켜야 한다.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왔다. 바깥공기는 깨끗했다. 20분 쉬고 다시 내려갔다. 요령이 생겨간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작업자의 숨소리만 들렸다. 갑자기 조명이 꺼졌다. 지하 15미터에서 맞닥뜨린 암흑에 낮은 비명이 나왔다. 혼자가 아니라 두렵지 않았다. 잠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했다. 포스코라는 자부심의 근원은 무얼까. 튼튼하게 기초부터 만든 건축물이며, 최고 수준의 철을 만드는 기술이며, 50년간 땀을 흘린 직원들의 열정이다. 그 건물의 가장 아래에서 희망을 찾은 것 같았다. 다시 조명이 켜졌다.


 고개를 들어 다른 작업자를 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이름도 부서도 모른다. 퇴직을 얼마 앞둔 전문가, 40대 중반의 가장, 30대의 신세대 아빠, 20대의 미혼 여성까지 함께 포스코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어두운 조명에도 드러나는 어깨선은 믿음직스러웠고,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과 장갑을 낀 손은 다정스럽게 보였다. 나이와 성별은 다르지만,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같다. 반세기에 쉼 없이 ‘철’을 생산해온 포항제철소의 상처를 보듬고, 다시 뜨거운 쇳물을 생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작업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마스크에 눌린 볼, 땀이 맺힌 이마에 햇살이 비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포항제철소는 포항시민의 피. 땀. 눈물로 만들었고, 포항시민이 근무하며, 포항시민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포항의 보물이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포항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시민제철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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