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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Oct 01. 2023

<이름보다 오래된>

'이 책 안 읽은 사람 없게 해 주세요 ' 첫 번째 이야기  

강원도 깊은 산속 골짜기에서 태어난 나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찐 감자, 옥수수, 밭에서 금방 딴 토마토 등이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농사일밖에 모르던 나의 어머니는 내가 편식을 한다고  한 번도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고 만두를 빚으실 때면 나를 위한 김치만두를 따로 만들어 주셨다. 그때 내가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은 어떤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 밭에서 갓 딴 농작물에서는 늘 어떤 음식보다 좋은 맛이 났고 고기의 물컹거리는 식감이 싫었다는 이유가 전부다.


그 시절 내가 육식을 거의 하지 않던 것과 달리 동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고기를 먹었다. 겨울이면 개울에서 잠자는 개구리를 잡아 숯불에 구워 먹었고 산에서 꿩, 멧돼지, 고라니를 잡아 오기도 하셨다. 심지어는 마당에 목줄을 매 놓고 키우던 개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이기도 하셨는데 어릴 땐 그런 일들에 대해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 근거 자체가 부재했던 듯하다. 다만 어른들이 얼마나 잔인한 행태로 개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왜 몇 년간 가족들을 향해 꼬리를 흔들던 개를 처음 보는 장사꾼이 와서 트럭에 실어가는지 의문스럽고 슬펐던 기억만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라니'는 그렇게 어릴 적 내 기억에 작은 조각으로 남은 동물이었고, 어른이 된 후 다른 존재로 내 삶에 등장한다. '로드킬', '어두운 밤 갑자기 도로에 나타나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는 동물'로 말이다. 그런데 최근 한 권의 책을 통해 고라니의 얼굴을,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름보다 오래된>이라는 책의 표지에  커다랗게 등장하는 고라니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물로 보인다. 그런데 책을 열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암담한 현실에 휩싸이고 만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이 동물은 유해야생동물 구제사업 대상이 되어 3분마다 한 마리씩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수는 2018년 한 해 기준 무려 약 17만 4천 마리. 인간에 의해 살 곳을 잃고 도로로 내려와 부지불식간에 죽임을 당하고, 농작물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만으로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정당한 살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진작가 '문선희'는 어느 날 도로에서 마주한, 두려움에 흔들리는 이 동물의 눈빛을 잊지 못해 '고라니'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라니와 시간을 갖고 눈높이를 맞추며 오랜 시간 이야기를 쌓은 것이 <이름보다 오래된>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 그 사진들을 한 페이지씩 찬찬히 넘기다 보면 슬그머니 눈물이 차오른다. 그 눈물은 살 곳을 무자비하게 빼앗기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이 생명에 대해 여태껏 모르고 살았다는 미안함, 아니 존재 자체를 이제서야 또렷이 인지하고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과 고라니 한마리가 가진 고유함을 깨닫게 되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문선희 작가가 아니었다면 누가 '고라니'를 조명해 주었을까, 말로 다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다. 온 마음을 다해 사회에 꼭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려 노력하는 '가망서사'에도 마찬가지다. 판형이 큰 데다 묵직해서 서점에 온 손님들은 이 책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다. 그래서 더 선물하고 널리 알려야 하는 책, <이름보다 오래된>이다.  #이책안읽은사람없게해주세요.


 

#2014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3만 6,296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2018년에 총에 맞은 고라니는 1만 4,869원어치의 농작물을 먹어 치운 혐의로 목숨을 잃었다.

- p.63


#개채수 조절이라는 말이 머리카락에 붙은 껌처럼 찜찜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정확한 통계와 구성원들의 합의, 적극적인 제도적 뒷받침을 바탕으로 한 인구정책에도 실패했다. 그런 인간에게 과연 야생동물의 개체수를 적정 수준으로 조절할 능력이 있긴 할까? 그보다 먼저 적정 개체수란 무엇일까? 한 종의 적정 개체수는 누가 어떻게 산정하는 것일까? '많다' 혹은 '적다'의 기준은 무엇일까? 피해의 정도? 그렇다면 피해와 가해의 기준은? 평온과 안전을 해치는 범죄는 누가 누구에게 저질렀을까? 질문이 고리에 꼬리를 물었다.

- p.65


# 지구는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더 중요한 생명체라는 과학적 근거는 없다. 생명체 간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른 것뿐이다. 그러나 자칭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주장이 인간 외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백인이기 때문에 백인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거나,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야생동물은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 p.70


#세상은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은 고라니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에 우리의 세금은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야생동물을 멸종위기에 처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멸종위기에서 지키는 것도 사람이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 p.192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미 중년이 된 지도 한참인데 종종 드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린 듯하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궁금증 많은 아이였던 시절을 뒤로하고, 세상 물정을 나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으로 성장하는 게 어른이 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기는 하다. 허나 이 과정에서 상실하거나 심지어는 능동적으로 버리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금 되묻게 되는지 모른다. 무엇이 어른스러운 것인지.

- p. 186. 김산하, '추천의 글' 중에서.


#사진이 뭔지도, 자신이 찍히는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눈망울 하나만은 공통된다. 그 외에는 조금씩 다르다. 느껴진다. 하나하나의 얼굴에서 고라니라는 보편성과 각 개체의 특수성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우리는 이들을 싸잡아 개체군이라 부른다. 많고 적음이라는 척도에 따라 그저 그 수를 조절해야 하는 무엇으로.

하지만 '군'이 되기 위해선 일단 '개체'여야 한다. 하나의 완성된, 고유한 개체. 그 개체가 나오기 위해 부모는 무던히 노력했을 것이다. 탄생 후 슬픔과 기쁨, 평화와 놀라움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어엿한 하나의 고라니가 된 이들이다. 생명의 위협이 도처에 널린 곳에서 당당히 자란 이들의 정면상은 마치 독립운동가들을 보는 듯하다. 순수하고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며 삶을 펼친 영혼들의 초상이다.

- p. 189. 김산하, '추천의 글' 중에서.



메인 사진 출처 : 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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