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자린고비에다 고집이 세고 성실만이 살길이라 믿는 고지식한 농사꾼이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를 밭으로 끌고 가 소처럼 일을 시키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자식들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가끔 엄마에게 폭력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인심을 쓰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길 바랐다. 어릴 땐 그런 아빠가 무서워 슬슬 피해다녔던 기억 뿐이다. 폐암으로 투병했던 2년간은 두통을 핑계로 어머니를 참 많이 괴롭히다 힘없이 떠나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오히려 엄마가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 나는 우직스럽게 살다간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낀다. 살면서 그런 아버지라도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하곤 했다. 그렇게 10년, 남편 없이 살던 엄마는 어느날 애인이 생겼다. 한동네 살던 아주머니가 엄마와 아저씨의 소개팅을 주선 한 것. 엄마는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드셨는지 처음 만난 날 아저씨의 집에 살기로 했다. 아저씨 또한 오래전 사별을 하셨고 홀로 시골집에 사셨는데, 엄마는 그집 마저 퍽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정반대되는 인품을 지녔다. 엄마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그냥 웃으셨고, 착하고 순해서 엄마와 사시는 동안 한번도 싸우지 않으셨다. 두 분의 러브스토리는 한번의 위기가 있었다. 아저씨의 큰 따님께서 두분의 교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 마치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엄마가 아버지의 재산을 노려 접근 한 것으로 큰 따님이 오해를 한 것이다. 순진한데다 쿨한 면모를 가진 우리 엄마는 ‘그럼 됐다. 안만나면 그만이다.’ 는 선언을 하셨고, 그 사이 아픈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큰 따님은 오해를 풀게 되었다. 두 분은 10년이 넘도록 아저씨의 집에서 사이좋게 지내셨다. 우리가 놀러가면 함께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여섯이나 되는 딸들의 집을 순회하며 서로 거리낌 없이 지내기도 하셨다. 엄마의 휴대폰에 아저씨는 ‘내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저장이 되어있다.
아저씨는 언뜻 봐도 체구가 약하시다. 자주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시곤 했다. 80세에 가까우시니 병이 찾아오면 버텨내기가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얼마전 아저씨가 입원하고 엄마가 홀로 아저씨의 집을 지키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차였다. 오늘 아침 나와 열두살 차이가 나는 큰 언니로부터 받고 싶지 않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막내야. 아저씨 돌아가셨대.”
엄마의 사랑이 떠났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눈물이 차올랐다. 자식을 다 떠나보내고 유일하게 매일을 함께 보내며 의지가 되던 ‘내 사랑’ 이 떠난 마음이 어떨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엄마의 우는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총명하지만 가난한 시골 집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지 못한 우리 엄마, 한 평생 시골에서만 살아온 우리 엄마는 한글을 완전히 깨치지 못해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용도로만 사용하신다. 이럴 때 엄마가 문자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저씨는 돌아가시기 직전 큰아들에게 ‘엄마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씀하셨단다. 저녁엔 엄마의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
“우리 엄마의 아저씨가 되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