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고 어리석은 리더’보다 더 나쁜 상황은 ‘성실하고 어리석은 리더’란 말에 무릎을 친 기억이 있다. 지혜롭지 못한 리더의 결정은 조직 전체를 망가뜨린다. VIP, 그분이 뭔가 일을 벌이면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배가 휘청거린다.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술이나 드시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았지 싶다.
한국 의료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OECD출신의 외국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동공확장’ + “어메이징” + ‘엄지 척’이 기본이었다. 이처럼 가장 효율적이고 편리하기까지 한 의료시스템이 지난 몇 달 만에 처참히 무너지고 있다.
오랫동안 의료윤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중립적인 의사들이 더 도덕적 의사로 행위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어느 집단도 80-10-10의 법칙에 예외는 없다. 10%의 성인반열, 10%의 악당들, 그리고 80%의 보통 사람들. 의사사회도 다르지 않다. 국가가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이 비율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여야 한다. 10%의 악당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성인반열의 비율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것이 ‘좋은 정책’의 기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2월 발표한 필수의료대책안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내용들로만 꽉 채워져 있다. ‘의사 만들기’가 입시학원의 온라인 수업방식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무 준비도 없이 내년부터 3배의 학생을 교육하라고 명하면 그냥 되는 건가? 불량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 뻔한데, 국민들은 몸과 맘을 그들에게 맡기고 싶어 할까?
아담 2의 실종
랍비 솔로비첵은 그의 책 <Lonely Man of Faith>에서 두 유형의 인간 성품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우리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있다고 보고 그것들을 아담 1, 아담 2라고 부른다.
아담 1은 우리 안에 있는 경력 지향적, 야심 찬 인간을 대표한다. 외부의 평가에 민감하고, 화려한 경력을 쌓아 자신의 객관적 가치를 높이려는 태도를 품은 성품이다. 무엇인가 창조하고, 경쟁적으로 찾으며, 보다 높고, 많고, 큰 것을 선호한다.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승리주의적, 외적 가치 지향적 인간이다.
반면 아담 2는 도덕적 삶의 질을 먼저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내적 평정을 중시하고. 자기 유익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선명한 판단을 중시한다.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한 존재가 되려 한다.
아담 1이 신의 창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려는 유형이라면, 아담 2는 창조세계를 섬기려는 유형이다. 윤리학적으로 풀어 말한다면 아담 1은 현실적이고 효용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상업형 인간이다. 당연히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부지런히 일하고 투자하여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는 성취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반면 아담 2는 내면에서 자기 욕망을 극복하고 내적이며 정신적 가치를 형성함으로써 성숙한다. 아담 1이 가져오는 성공은 아담 2의 실패가 되기도 한다. 성공은 만족을 넘어 오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담 2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가 오히려 새로운 배움과 겸손으로 그를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아담 1만 키우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국회, 검찰, 경찰, 판사, 대기업... 여기에 의사도 더 이상 예외는 아닌 듯하다. 작금 아담 1의 최정점엔 현 대통령과 복지부 관료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상식은 죽었다.
........ 멈출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착각이었다.
제자들의 '거의 전부'를 건 투쟁에 교수들은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렸다. 교수들마저 떠나면 진짜 생명 위해상황이 초래될 수 있기에 지켜야 했다. 학생들이 돌아올 날을 고대하며 동영상 강의를 올렸고, 전공의들이 떠난 당직실을 지키며 날밤을 세웠다. 그랬어야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생이자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총선 이후 대통령의 무신경한 담화를 듣고 알아차렸어야 했다. 교수비대위에 투쟁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너무나 신사적인 서울대, 연세대 비대위는 '대한민국의료의 미래'... 등을 주제로 고상한 세미나를 열었다. 그러는 사이 대교협의 의대정원 확정 발표가 나 버렸다. 밍기적거리다가 대한민국 의료의 사망선고에 이어, 관뚜껑에 대못까지 박혀버렸다.
고법이 정부 측에 2000명 증원의 근거자료를 제출... 운운해서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더랬다. 지나고 보니 이 조차 행정-사법부의 시간 끌기에 의사들이 당한 셈인 듯.
상대를 너무 젊잔케 본 것이 패착이었다. 죽창과 도끼로 무장한 폭도들을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타이르다 처참하게 유린당한 느낌이다.
현 정부는 오랑캐인 거란보다 무도했고 교수들은 강동육주를 되찾은 서희가 될 수 없었다.
“만일 당신이 파업이라는 최상의 무기를 포기한다면 당신은 보병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육군 장군과 같은 꼴이다.”(Weismann)
“많은 경우에 의사들의 염려는 환자들에 대한 염려였으며, 의사들이 부적절한 근무환경, 고장 나고 오래된 의료장비, 불결한 병동 환경 등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환자들에게 심각하고 장기적인 손상을 끼친다. 따라서, 파업에 의한 ‘환자의 손상’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의 환자뿐 아니라 사회전체로서의 환자라는 개념을 인식하지 못한 속 좁은 편견에 불과하다.” (Brecher R)
“우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윤리성에 반하는 파업 정책을 의도한 적이 없다. 그러나 파업은 궁극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협상도구이다. 만약 당신과 협상하려는 상대방이 당신이 파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협상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될 것이다.”(Randolph)
이번 투쟁은 전 세계 의사파업의 역사상 가장 실패한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젊은 제자들의 아까운 시간과 심신의 트라우마라는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래 한국의료를 망칠 것이 분명한 증원을 막아내지 못했으니.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나를 포함한 교수들에게 있다.
의사파업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전공의 파업+의대생 자해휴학이 전부였던 투쟁에서 교수들의 희생적 행동은 결국 정부가 '바라던 바'였다.
이제 와서 촛불집회가 무슨 소용일까 싶다.
그보단, 영화 [서울의 봄]에서 행주대교를 온몸으로 막아섰던 이태신 장군의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