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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쮸댕 Dec 10. 2022

SF가 인문학적 고민을 담을 때 - 테드 창, <숨>

이것은 문화 인류학이다

그저 천재적인 상상력의 결과물 이기만 한다면, SF소설이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을까.


여기서 한국인 특유의 '교훈'강박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어디에서든 가르침의 메시지를 찾으려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사실 SF영화나 소설은 흥미에 치우친 부분이 많아서 타임 킬링 용도가 아니라면 잘 찾아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테드 창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한편씩 읽을 때마다 벅찬 느낌을 받았다. 과학 이론들을 흡수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기도 하지만 이것은 수단일 뿐, 진짜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테드 창의 소설을 단순 SF로 분류하기에는 담긴 메시지가 너무 인류학적이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기술이 발달하면서 동영상이 인간의 모든 기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게 되는 시대를 그린다.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을 영상으로 영구히 기록하는 게 가능해질 때, 만약 우리가 완전무결한 정확한 기억을 갖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실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는 가장 현실과 가까운 스토리다. 이토록 매 순간을 동영상으로 기록하고 어딜 가든 cctv가 설치되어 사람들의 행동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된 현실에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기억을 왜곡하고 살아가는 게 꼭 개선되어야 할 부분일까.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기억을 왜곡하는 것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힘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늘 실수를 하고, 후회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걸 심하게 자책해서 스스로를 망가뜨릴 위험에 처하기도 하니까. 완벽한 기억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어느 정도 망각을 해야 한다. 과거의 심적 고통을 더 이상 생생하게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을 유발한 행위를 용서하기도 더 쉬워지고, 그 결과 해당 기억 자체가 덜 중요해지는 식으로 말이다. 과거의 당신을 격분케 했던 악행도 반추의 거울에 비춰 보면 용서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리적 피드백 고리가 존재한다. 288p
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301p


테드창, <숨>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수많은 공상과학영화에서도 다루는 평행세계를 소재로 한다. 최근에 읽었던 <아노말리>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여러 개의 평행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확장된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른 우주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할 때, 그는 인생에서 나와 얼마나 다른 선택을 할까. 그리고 평행세계의 '나'와 손쉽게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양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들을 이용할까.


내가 여전히 '나'라는 사람이고 고유한 성격을 지닌 존재인 이상 그 모습들은 특정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다. 그 선택들을 쭉 나열해서 관찰하면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성격을 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무엇보다 평행세계와 접속할 수 있는 도구로 '프리즘'을 상상해낸 능력이 놀랍다. 그 도구가 마치 휴대폰이나 컴퓨터처럼 보편화된 세계를 그리는 것. 가히 천재적이다.


어떤 갈래의 세계든, 그곳에서 당신의 부모가 서로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면 당신도 반드시 태어났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이지만, 그 누구의 탄생도 필연적이지는 않다. 실리 통가는 일 년 동안 계속된 실험을 통해 수정이라는 행위가 그날의 날씨를 포함한 주위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을 밝힐 심산이었다. 423p


맨 뒤에 수록된 작가의 <창작 노트>를 읽으면 의도라든가 이야기에 담긴 의미들이 더 명확해진다. 어쨌든 작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얼마나 명료한지, 그리고 그것들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테드 창_숨

#테드창

#exhalation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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