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아한 술꾼 Jan 20. 2016

호주식 먹고 마시기 ①

나만의 호주 여행 기록

시드니까지 10시간 반, 호주 국내선으로 환승한지 한 시간 반만에 멜버른에 도착했다. 기온은 높았지만 습하지 않아 나쁘지 않았다. 친구 부부가 공항에 나와주었다. 장거리 비행으로 굽어진 등과 다리가 친구 얼굴을 보자마자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직항도 없는 멜버른을 여행지로 정한 것은 순전히 이 친구가 보고 싶어서였다. 

친구 시어머니께서 캠핑가로 호주 전역을 여행 중이신데 마침 친구 집에서 한 달째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덕분에 아이들을 잠시 맡기고 나온 친구는 짧은 휴식시간을 받았다며 좋아했다. 일단 점심을 먹으러 이탈리안 식당들이 모여있는 라이곤 스트리트 쪽으로 가기로 했다. 기억나는 라이곤 스트리트 맛집 이름을 몇 개 읊었지만 호주 현지인인 친구 남편은 들어본 적 없단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쓴 블로그를 보고 외웠으니 그럴 법도 하다. 친구 남편이 회사 사람들과 가끔 들렀다는 이탈리안 식당으로 향했다. 주문은 현지인 담당. 센스 있게도 입맛을 돋우면서 식사와 곁들일 와인을 우선 주문해주었다. 관광객을 위해 당연 호주산 와인이다. 상큼한 과일향이 웃도는 시원한 샤도네이는 더운 여름 날씨에도 딱이었고, 곧이어 나올 해산물 요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음식과 잘 어울렸다. 


호주 음식은 대체로 짠 편이다. 요새 건강을 생각해서 저염식을 추구하다 보니 호주뿐 아니라 어느 나라를 가도 음식이 짜다는 생각은 늘 하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이 짠맛을 중화시켜줄 와인이 필요하다. 뭐, 애주가들은 어떤 부분에서도 술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을 둔 부부가 아이 없이 이렇게 단독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우리는 호텔 따위에 들를 시간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멜버른 시티를 중심으로 봤을 때 동쪽에 있는 단데농이라는 곳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관광 상품을 보면 여기서 사람들은 기차도 타고 하던데, 기차는 보지도 못했고 현지인 드라이브 코스를 지나 탁 트인 하늘을 보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다 같이 즐겼다. 친구도 아이들에게 이만 가봐야 하고, 나 또한 이번 여행을 위해 나름 준비한 것들이 있기에, 우린 일단 헤어진 후 주말에 친구 집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토요일 저녁 친구 집으로 향했다. 멜버른은 지금 한참 여름이라 말이 저녁이지 7시에도 대낮같이 환했다. 

처음 간 친구 동네는 영화 속에서 보던 집들처럼 단독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집들이 비슷하게 생겨 이곳이 맞나 싶을 때 마당에 세워진 캠핑카가 보였다. 시어머니의 차인 듯했다. 주차 후에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시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나와 반겨주셨다. 서로 이름을 소개하고, 포옹하며 내 동행은 영어가 서툴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 전혀 중요하지 않다며 우리의 한국어 이름 발음을 열심히 연습하셨다. 

시어머니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자 곧이어 시아버지께서 나오셨다. 그리고 뛰어나오는 귀여운 아이들. 첫 아이는 아주  갓난아기일 때 한국에서 잠깐 봤고 둘째는 처음 봤는데 두 아이 모두 어느새 훌쩍 자라 뛰어나와 반갑게 혹은 수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안에 드디어 발을 들여보니,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오늘 저녁 함께할 내 친구의 가족들을 이제야 다 봤구나. 


호주 일반 가정집에 처음 들어가보는 경험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적당한 크기의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주방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각각의 역할을 하는 거실들과 부부 침실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아이방, 손님방이 있었다. 특히 왼편의 거실들은 아이들 노는 공간, 컴퓨터와 소파가 있는 공간으로 나뉘어는 있지만 모든 공간이 서로 통해있었다. 아파트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 구조는 아이들이 뛰어놀기에도 좋아 보이고, 가족들의 소통에도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친구 남편은 호주 이곳저곳 지역의 와인들을 펼쳐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4쉬라즈(바로사), '12피노누아(질롱), '13까베르네소비뇽(마가렛리버), '12까.소.(프랭크랜드리버), '13쉬라즈(바로사)

간략히 자신이 고른 와인을 소개해주더니, 나보고 식사를 준비하며 마실 첫 와인을 고르라고 했다. 손님에 대한 예의였을 텐데, 취향 테스트라도 당하는 듯 긴장됐다. 더욱이 어르신들도 계시니 신중히 고민했다.

호주 와인 산지별 특성을 잘 알지는 못해도 기본적인 품종의 특성은 대략 다 비슷하다. 

쉬라즈는 호주에서 특히나 유명한 품종이고 그 자체로 참 맛있다. 하지만 식전에다, 뒤로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와인 시리즈의 스타트로 먹기에는 맛이 강한 감이 있다.

피노누아는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산도가 쉬라즈보다는 약하다. 

까베르네 소비뇽은 내가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두병이나 사 왔을 것이다. 이미 친구 남편은 내가 레드와인/화이트 와인 별로 어떤 품종을 좋아하는지 조사해갔었다. 내가 까베르네 소비뇽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peppery 한 (후추향이 나는) 와인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자체 해석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 말에 100%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친구 남편의 해석이 그렇다면 첫 와인으로 굳이 후추향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

"피노누아로 하자!" 다행히 한 병밖에 없어 품종 선택으로 결정은 끝. 

시어머니와 친구 남편은 굿초이스라고 칭찬해주셨다. 뭘 골랐어도 같은 반응이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와인을 한잔씩 따르고, 남자들은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여자들은 그동안 식탁에서 와인 한잔씩 하면서 쉬는 것이 '호주식'이라며 식탁에 여자 셋만 놔두고 남자들은 모두 마당으로 나갔다.

친구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덕분에 열심히 치즈를 잘라주고, 나와 시어머니는 잘라준 치즈를 곧잘 받아먹으며 와인과 본격적인 수다를 시작했다.


시어머니는 여행을 시작하신지 8개월째라고 하셨다. 호주 지도를 펼쳐 그동안 본인이 들른 곳을 짚어가며 설명해주셨다. 특히 호주의 서쪽이 무척 아름답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내 여행 일정에 포함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본인은 친구 남편 즉, 본인 아들의 생부인 사람과는 이혼을 했고 지금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있는 분과 만나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He's not well educated."  이런 표현을 갑자기 쓰셔서 당황한 나는 친구를 쳐다보았다. '교육을 잘 받지 않았다고?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시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BUT 그러나, 이 사람은 인생의 지혜를 아는 사람이고 할 줄 아는 것이 많다. 직업이 배관공이었는데 수리를 못하는 것이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다는 자랑을 위한 반전의 문장이었다는 것이 금세 밝혀졌다. 아마도 얘기 중이었던 캠핑카 여행의 동반자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강조하고 싶으셨나 보다. 최근에 집안에 고장 난 곳을 수리해주셨다며 친구도 옆에서 거들었다. 나 또한 정말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셨다며 방청객 수준의 공감으로 답해드렸다. 형광등을 잘 간다든지, 운전을 잘한다던지 요리를 잘하는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내 친구들도 알고 있으려나.


이야기가 한참 익어갈 무렵 어느새 두 번째 와인을 고를 시간이 왔다. "이번엔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해보자!  어제저녁에 갔던 식당에서 'Franklin tate estates'라고 똑같이 쓰여있는 와인 한잔 마셔봤는데 괜찮았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옆에 프랭크랜드라고 쓰여있었던 것과 같았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다. 여하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사이 고기들이 구워지고 식탁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호주식'은 모두가 식탁에 앉기 전에는 먼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어른이 수저를 들기 전에 먹지 말라는 '한국식'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 왔다고, 고기 역시 종류별로 준비되어있었다. 소, 닭, 돼지, 양, 캥거루.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무슨 소리! 맛은 모두 봐야지. 열심히 고기를 자르고 있다 보니 세 번째 와인 고르는 시간이 왔다. 적당히 췻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아 친구 남편에게 가볍게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친구 남편은 쉬라즈를 내왔다. 정확히 어떤 병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때 췻기가 이미 많이 올랐나 보다. 사진상으로 보니 쉬라즈 두병을 모두 마셔버린 것만 알겠다. 

이집 식구들은 양이 많지 않은지 본인들의 양을 먹고 나면 접시들이 치워지기 시작했다. 계속 놔두면 난 저 고기들을 모두 먹어버릴 수 있었는데.. 천천히 먹는 내가 힘겨워보였는지 그만 먹어도 된다고 친구 가족들은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난 정말 다 먹을 수 있는데... 다 먹으면 난 한국에서 온 대식가 미개인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예의상 포크를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접시는 치워졌지만 와인과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가며 누군가는 통역 역할을 하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영어를 더 잘하지 못해서, 한국어를 못 알아들어서 살짝의 답답함은 각자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와인 마시며 음식 먹으며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 내가 사랑하는 집합체가 현재 진행형이었다. 누가 어떤 술 좋아하냐고 물으면 와인을 주로 얘기하는 편인데 와인을 잘 안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이 시간에 조금 흥을 돋구워주는 촉매제로의 역할이 아무래도 벌컥벌컥 마시는 소주나 맥주보다는 와인이 나을 때가 많다. 

순간 내 동행이 지금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다고 말했다. 특히 외국 영화에는 가족 여러 명이 모여 식사하며 즐거운 대화를 하는 모습이 자주 그려지는데 꼭 그 장면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다고 했다. 조금 웃긴 감은 있었지만 나도 다른 각도로 특이한 상황이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 시부모님과의 식사라니! 유난히 시월드에 대해 편견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긴 하다. 내가 한국에서 다른 친구의 시어머니와도 이렇게 즐겁게 대화를 오랫동안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식사가 끝나면 시부모님들은 먼저 일어나시지 않을까 내심 잠깐 생각했었다. 우리나라 같은 평우 편히 이야기 나누라며 빠져주시는 것이 보통의 상황이니까. 하지만 며느리의 한국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 신기하셨는지 혹은 즐거우셨는지 아니면 이것이 '호주식'인지 밤 12시가 되어서야 피곤하시다면서 먼저 일어나셨다. 이미 나도 췻기가 오를 때로 올라 멈출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반짝 반짝 빛나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