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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태선 Oct 23. 2020

그 남자의 카레 한 끼

하루를 끝내는 평범한 직장인의 삶의 단편

"자, 카레를 먹자."


노랗고 향신료 특유의 알싸한 향이 나는 카레를 앞두고 그는 한껏 고양되었다. 그는 일 년 365일 카레를 먹어도 될 만큼 카레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의 자취방에는 한편에서는 언제나 카레 분말의 향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분말 카레뿐만 아니라 고형 카레와 3분 카레가 있고 눈을 냉동실로 돌려보면 직접 만들어 얼려 놓은 카레도 찾을 수 있는데 냄새마저 꽁꽁 얼어붙은 그곳에서도 미약하지만 카레 향이 나는 기분이 든다. 먼지가 방 한가운데를 굴러다니고, 옷은 널브러져 있어 누가 봐도 혼자 사는 남자의 방처럼 보이지만 카레와 멀찍이 떨어진 작은 케이지 내부에는 그의 가족이 살고 있다. 바로 치즈라고 불리는 햄스터인데, 이름이 치즈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듯이 배는 하얗고 등은 샛노란색 털이 인상적인 햄스터이다. 사실 그는 햄스터의 이름을 카레라고 짓고 싶었다. 마치 따뜻한 쌀밥에 카레가 얹힌 것 같이 보이는 햄스터에게 그보다 좋은 이름을 붙여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음식 이름이라도 카레라는 이름은 보편성이 떨어지고 햄스터를 부를 때마다 배가 고파지는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었기에 치즈라는 흔하디 흔한 이름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본인의 배를 채우기 전에 가족이자 동거 햄스터인 치즈에게 해바라기 씨앗 몇 개를 주었다. 휴지심처럼 어둡고 좁은 터널에서 자고 있던 햄스터는 밥그릇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바로 해바라기 씨앗을 먹지는 않았다. 잠시 남자의 눈치를 보던 햄스터는 밥그릇에 있는 해바라기 씨앗을 허겁지겁 입안에 가득 물고 어둡고 좁은 터널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햄스터에게 있어 남자는, 태어나서 3개월이나 겪은 사람이지만 아직도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지 밥은 꼭 좁고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서 먹는다. 남자는 햄스터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본인도 밥을 먹기 위해 몸을 돌렸다.


공부 책상 겸 식탁인 그의 책상 위에는 까맣고 빨갛고 파란 필기구와 반쯤 읽다 말은 것처럼 보이는 책이 널브러져 있다. 잡동사니를 밀치고 나온 좁은 공간, 책상의 오른쪽 구석에는 그의 저녁밥이 놓여있었다. 갓 만들어 뜨거운 카레와 어제 먹다 남은 식은 밥, 그리고 어머니표 김치. 특별한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는 그 밥상을 보며 그는 고양감에 빠져들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카레는 평소보다 더 특별히 신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생략하던 과정인 캐러멜 라이징 한 양파를 넣어 보다 감칠맛을 끌어올렸고, 평소에 먹는 100그람에 천원도 안 하는 돼지고기 뒷다리가 아닌 100그람에 이천 원가량 하는 소고기 부챗살을 넣었으며, 싸구려 분질 감자가 아닌 비싼 점질 감자를 넣어 카레의 맛이 밴 달큼하고 쫀득한 감자를 맛볼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반쯤은 옷걸이로 사용되고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와 밥그릇 앞에 안착한 후 뜨거운 카레를 식어서 딱딱해진 밥 위에 조금씩 끼얹기 시작했다. 딱딱해진 밥덩이 사이를 뜨거운 카레 국물이 풀어주고 또 밥알에 적당히 수분감을 줄 수 있을 만큼 끼얹었을 때, 드디어 첫 수저를 떠서 입에 넣었다. 그의 첫 수저는 언제나 다른 부속물이 섞이지 않은, 오로지 쌀과 카레 국물만 섞어서 먹는다. 다른 것이 섞이게 되면 카레가 맛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재료들이 맛있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훨씬 맛있는 첫술을 입에 넣으며 그는 마음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 맛에 카레를 먹지.


귀찮은 과정이 많을수록, 비싼재로가 들어갈수록 역시나 카레는 맛있어진다. 첫술이 들어가기 무섭게 그는 카레를 밥 위에 가득 부어 서걱서걱 비비기 시작했다. 딱딱한 밥을 숟가락으로 부수면 그곳에 가득 넘치던 카레가 들어가고 그 카레가 밥을 녹이며 수분감을 주는 일련의 과정은 퍽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먹기 위해 야채와 고기가 섞인 카레를 한술 크게 뜨고 그 위에 어머니표 김치를 척하니 올렸다. 김치를 올리고 김치통을 보니 아마 이번 카레를 먹으면 김치를 다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다 먹고 김치를 인터넷에서 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두 번째 숟갈을 입으로 넣었다. 사실 그는 그냥 본가에 들러서 싫은 척, 못 이기는 척, 하며 어머니의 반찬과 김치를 조금 받아오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짐이 잔뜩이라 불편하고, 여태 싫은 소리를 한 게 있어 혹여나 주지 않으면 실망할까 봐 애써 모른 척을 하고 있다. 귀찮더라도 본가에 한 번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카레를 또 한술 입으로 집어넣었다. 원래는 펄펄 끓어 뜨거웠던 카레가 식은 밥을 만나 따끈한 온도로 바뀌고, 거기에 김치를 올려 혹여나 데일 수 있는 입천장을 완벽하게 보호해주는 어머니의 사랑 손맛을 느끼며 먹는 카레는 역시나 최고의 맛이었다. 카레를 먹으며 치즈를 보니 터널 안에서 꼼지락 거리는 게 치즈도 터널에서 얌전히 해바라기 씨앗을 까서 야금야금 먹는 것 같아 보였다. 햄스터나 자신이나 거의 매일 똑같은 것을 먹는데 질리지도 않고 잘 먹는다는 생각이 들어 동질감을 느꼈다. 치즈도 해바라기 씨앗을 먹는 것을 멈추고 잠깐 그를 본 것 같았지만 이내 꼼지락거리며 다시 자신의 수확물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문득 치즈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무시하고 카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세끼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던 카레가 줄어들고 한솥이나 있다고 생각한 밥이 바닥을 보이자 그는 급격한 포만감을 느꼈다. 배가 불렀지만 비벼놓은 카레는 다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꾸역꾸역 입에 음식을 집어넣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릇의 내용물을 그의 배로 옮겼을 때 비로소 그는 더 이상 먹지 못한다는 느낌과 더불어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은 목표를 달성한 성취감도, 배부르게 먹어 생긴 포만감과 행복도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을 둘러쌓고 있는 답답함이 한 꺼풀 벗겨졌다고 느꼈다. 오늘 하루도 맛있는 카레를 먹을 수 있었음에 생긴 것도 모르는 신에게 감사했지만 눈 앞의 물건들을 설거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걸 꼭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내일 저녁은 시켜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잠시, 그는 일어나 자신의 식기와 조리도구를 모두 싱크대에 넣었다. 만약 지금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면 내일 회사에서 퇴근하고 설거지와 요리, 그리고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싫었기 때문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되새기며 이것이 옳은 선택이라는 믿음 하에 그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세제를 수세미에 묻힌 후 박박 비벼 거품을 내고 그것을 이용해 싱크대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닦기 사작했다.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귀찮아 보이던 설거지도 막상 하면 더러운 것이 없어진다는 쾌감에 그럭저럭 할만해진다. 카레를 끓인 냄비는 카레를 자주 끓여서인지 아랫부분이 다른 곳보다 노랗게 물들어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본인이 카레를 자주 먹는 것만큼 냄비도 카레를 먹어 조금씩 조금씩 노랗게 물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냄비도 이러한데 자신의 혀나 목구멍, 위는 어떨지 생각하니 약간 즐거워졌다. 운동은 귀찮아서 하지 않지만 카레를 먹는다는 행위가 이렇게 하루하루 쌓여 내 몸에 변화를 준다는 것이 운동과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카레를 먹는 것처럼 운동을 하게 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에 그는 살짝 닭살이 돋았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 자신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런 멋진 몸을 갖게 되어 많은 사람의 감탄 어린 시선과 질투를 받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있지도 않은 일에 기뻐하며 그는 다시 뽀득뽀득 설거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설거지의 마지막으로 싱크대에 묻은 세제 거품을 물로 씻어내고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는 생각에 개운해짐을 느꼈다. 서른 살의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가는 것을 보며 여태까지 별로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어렸을 적 나이 서른은 엄청나게 큰 어른처럼 보였는데 서른이 된 지금은 몸만 커진 어린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이다. 어렸을 적 지금 정도의 나이면 아직 무슨 일을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역동적이고 대단한 일을 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현실은 그저 조직의 부품으로 시키는 일만 깨작깨작, 언제 퇴근시간이 되나 시계만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는 점이 슬펐다. 어찌 되었든 그는 사회의 부품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당장 내일도 불투명하기에 지금의 삶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 그것을 벗어나기에는 너무 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나 적막함이 감도는 방의 가운데 서서, 그는 자신의 반려동물을 바라봤다. 열심히 챗바퀴를 굴리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 저 동물에게는 삶이 같은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공허한 울림으로 남은 채 질문은 사라져 간다. 아, 자야 내일 출근하지. 출근만을 위해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불합리하다 생각하지만 만약 출근도 아니었으면 컨디션 조절이 아닌 건강해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침대에 누웠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이불로 몸을 둘둘 싸맨 그의 몸은 영락없는 햄스터였다. 그는 그렇게 고단한 하루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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