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3. 소비의 동인
앨런 밀러, 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박완신 옮김
원서 2008, 번역서 2008.
진화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번식하는 것을 최고+최대+최후의 목표로 갖고 있는 생명체라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왜 결혼을 매우 늦게 하게 되었는지 역시 진화심리학적인 분석이 가능할 것 같다.
일단 나는 유전자 번식에, 즉 애 낳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절대 후손을 남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인류의 멸종과 세상 멸망에 적극적인 태도인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냥 진짜로 말 그대로 표현 그대로, 관심이 약한 사람이었다. 다양한 개체가 있다면 특정한 기준을 두었을 때 무척 강한 사람도 무척 약한 사람도 있으니, 나는 그중에서 무척 약한 사람이었던 게다. 이는 남자를 보는/고르는/판단하는 눈에서 드러났다. 여성들이 보다 잘생기고, 보다 돈이 많고, 보다 괜찮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은, 진화심리학의 가장 중요한 전제, 즉, 나의 유전자를 보다 안전하게 전달하고 싶은 욕구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적응도가 높고, 체내잉태를 해야 하므로, 나와 내 자식이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지내려면 내 자식의 생물학적 아빠의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 우리나라는 일처일부제이고 결혼의 구속성이 강한 편이므로, 더더욱 골라야 하는 지경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나는 왜 남자의 조건에 민감하지 않을까, 가 내가 살아오면서 가진 가장 큰 의문이었다. 이런 내가 싫은 건 아닌데, 싫기도 했으니까. 이 의문은 이 책을 읽으며 풀렸다. 나는 유전자 번식에 관심이 약한 개체로 태어났을 뿐이다. 유전자적으로 변이인지, 유전이 거듭된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나의 내적 태도와 상관없이, 만약 나 자신이 유전자 번식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되는 외형을 가졌다면, 그러나 얘기는 또 달라진다. 젊음, 긴 머리카락, 가는 허리, 풍만한 가슴, 금발, 푸른 눈동자 등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진화가 좋아하는 '섹시함'의 요건이다. 우리는 동양인이니 금발과 푸른 눈동자는 까맣고 윤기 나는 머리와 까만 눈동자로 대체해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젊었을, 아니 어렸을 때부터, 다섯 가지 요소를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태생적으로 허리가 굵고 가슴이 작은 체형이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갈색인데, 머리는 주로 짧은 단발로 하고 다녔다. 그리고 서른이 넘어가면서 '젊음' 조차 사라지기 시작해버렸다...
음.
그래도 나는 내가 '또 다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어왔다. 소위 말하는 현대사회의 마땅히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부를 잘 하고(=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고), 잘 알려진 학교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적으로 이러한 조건은 더더욱 번식에 매력적이지 못하다. 왜냐면 인류의 두뇌는 수렵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두뇌는 친족 관계의 수렵채집민이 150명 남짓 되는 작은 무리로 모여 살던 초창기 환경에 적응하는 것으로 맞춰져 있어서, 여러가지 사회적 체제는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번식을 하고 싶은 남성 개체들이, 나의 이러한 조건에 매력을 느낄리는 만무했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눈을 낮추라고 했었다. 그러나 실은 나의 경우 높은 기준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준이 아예 없었고, 필요없는 기준을 들이밀었었다. 내 입장에서 나와 눈이 맞는 사람들의 군집은 나에게 관심이 덜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은 본능적으로 나에게 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진화심리학적으로 당연한 거였다.
어찌어찌어찌, 나는 이런 나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 늘그막에 결혼을 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조건인 '젊음'이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나의 번식은 매우 성공적이다. 허니문베이비 첫째와 연년생 둘째를 낳았다. 부모님은 실은 내가 임신이 어려울까봐 걱정하셨다고 한다. 현대의학으로도 무리가 있는 연령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는/보이는/어필하는 조건과는 상관없이, 성향과는 반대로, 나는 번식에 최적화된 개체였다.
진화심리학의 기준을 들이대면 요즘 화두가 되는 성적 차별, 차이, 육아 문제는 물론, 취업시장 자체의 차이, 또 추가적인 임금차까지도 단/순 하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러다보니 마치 만능양념, 아니라 전지전능이론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미친 소리 같긴 한데, 상당히 그럴 듯 하단 말이지. 하지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이론대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 부여되진 않는다. 통계적인 근거가 있고 따라서 평균적으로 진실일 가능성이 있는 경험적 일반화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고 다른 사람(또는 집단)을 대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주진 않는다. 경험적 일반화를 고정관념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이는 행동처방이 아닌 세계의 관찰결과일 뿐이다. 고정관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향이 어떠하며 어떻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가이지,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가 아니다. 과학에는 '당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가 아무리 초창기 환경에 머물러 있어, 진화적 심리적 기제가 살아남거나 번식에 성공할 확률을 높이는 행동을 선택하려는 경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2018년의 고도화된 '사회'에 사는 개체들이다. 인간이 최근 -겨우- 몇천년간 만들어온 각종 규제와 정책과 행동강령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안정적인 생존과 더 나은 번식을 보장하는 현명한 선택이다. 그게 우리네 100년도 안 되는 삶의 최선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두의 목표는 '살아남기'가 아닌 '잘' 살기니까.
김쌤의 추천이유
아쉽게도 절판이 됐지만 진화심리학에 입문할 때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줄 수 있는 책이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구조와 논점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만 '소비' 문제에 특화돼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소비행태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많은 함의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