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뒀다며? 계획은 있니? 애인은 있어? 뭐 먹고살 건데?를 회피하다
백수에게 명절은 매우 불편한 존재다. 일가친척에게 둘러싸여 "퇴사했다고? 이직은? 꿈이 뭐니? 애인은 있니? 결혼할 거니? 돈은 모았니?"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입이 바짝 마른다. 우리 친척들은 간섭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멀쩡하게 회사 다니는 사촌보다 이 시국에 퇴사한 내가 더 이야깃거리가 되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을 거다.
코로나를 반가워하는 건 아니지만, 비대면 추석은 나를 한숨 돌리게 만들었다. "너 어쩌려고 그래?"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었다면, 어쩌라고 싶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개방적인 편인 친척들이 설마 그렇게까지 말하겠냐만, 혹시 모르는 것이다. 비대면 추석은 걱정과 덕담이라는 베일에 싸인 문책을 피해가게 만들었다. (김영민 교수님의 레전드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가 떠오른다)
어른들의 자식 자랑을 안 들어도 된다는 것도 좋다. 친척 중 매번 명절마다 지치지도 않고 자랑을 하시는 분이 있다. 자식이 자랑스러울 수 있다. 또 그걸 친척들에게 자랑할 수 있다. 그런데 미묘하게 다른 사람을 깔보는 느낌이 있어 거슬린다는 게 문제다. (우린 이런데, 너흰 안 그렇지?) 나는 행복하고 괜찮게 살고 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의 자식보다 더 잘난 거 같은데(이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게 짜증 난다. 사촌들이랑 사이 나쁜 것도 아닌데 괜히 서로를 비교하게 만든다. 우리를 내버려 둬!). 그런 자랑을 비위 맞춰주며 듣고 있으니 피곤했다. 자식 자랑에서 해방된 비대면 추석 만세.
비대면 추석의 또 다른 장점은 전을 안 부쳐도 된다는 것. 엄마는 오랫동안 장사를 했다. 당연히 명절에 쉴 수 없었다. 장사를 그만둔 엄마는 명절에 전 부치는 게 좋다고 했다. 자기는 10년 동안 아무 데도 못 가고 가게에만 있어야 했으니까, 남들처럼 명절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 장단에 맞춰줬다. 전도 싫어하고, 부치는 것도 싫어하지만 엄마가 그렇다니 굳이 반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부친 전은 아빠 쪽 친척들에게, 엄마 쪽 친척들에게 고루 돌아갔다.
근데 그것도 5년을 반복하니 "엄마 난.. 할 만큼 했어(파들). 이제 전 안 부치고 싶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근데 마!침! 친척들이 만나기 어려운 코로나 시국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졌다. "가족들도 못 보는데 굳이 전 부쳐야겠어? 마음은 선물로 표현하고 우리끼리 맛있는 거 해 먹자"라고 설득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 엄청난 명절 노동을 안 해도 된다니 해방이다! 회사 당직 핑계를 댈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노예가 됐어야 할 텐데. 여러모로 백수에게는 행복한 명절이다. 우리는 가족끼리 맛있는 음식을 해먹기로 했다. 모두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