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모마일 Chamomile
나는 '을'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태반이 어떤 점에서는 '을'로 살아간다지만 나의 직업은 너무나도 확실히 규정된 갑을 모시는 *대행녀다. 꼬꼬마 사원 시절부터 지금은 과년한 x장님까지 '을'의 생활을 10년간 해오면서 정말 다양한 종류의 갑질과 함께해왔다. 지금은 그저 앵가히 하는 갑질은 애교로 봐줄 정도의 수양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댓 번쯤(?)은 아주 깊은 빡침에 빠진다. 그것은 월화수목금금금 준비한 경쟁 PT의 졸망/개망, 고갱님의 사정에 의한 일방적인 계약 파토, 밤샘에 밤샘을 더해드리는 푸짐한 업무 폭탄 등 '일' 자체에 대한 빡침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마음 둘 바는 더더욱이 모르겠는 내장 깊숙이에서 끓어오르는 깊~은 빡침은 주로 사람에서 사람을 타고 조용하고 은밀하지만 매우 치밀하게 파고든다. 여기서 내 빡침 기억들을 주섬주섬 꺼내어 그놈이 미친놈일세 그 년이 죽일 년일세 눙.물.없이는 볼 수 없는 신파로 치닫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나의 깊은 빡침의 시간을 조용히 토닥여주는 차(Tea)가 있다고 오늘도 어디선가 빡쳐있을지 모를 당신께 말해주고 싶다.
* 캐모마일 차(Tea)다.
그래 맞다. 국화와 비슷하게 생긴 꽃을 말려서 담아놓은 것 같은, 약간 발효된 듯한 쿰쿰한 냄새가 나서 이름보고 골랐다가 내팽겨쳤을지 모를, 카페에 가면 서브 메뉴인 허브티 메뉴 귀퉁이에 쓰여 있을까 말까 한, 그 차(Tea)가 캐모마일이다. 예쁜 노랑 물빛을 지닌 이 차(Tea)는 이름처럼 또 그 물빛처럼 예쁜 꽃을 피우는 허브이다.
아~ 여자여자하니 이쁘다. 이미지 출처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차는 매우 강한 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티백 봉투를 들고 냄새를 맡으면 정말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난다. 하지만 일단 뜨거운 물에 우려내면 노란 물 빛에 너무나 어울리는 상큼하고 깊은 향미를 준다. 아~ 좋다.
하루 종일 날아든 쨉을 방어하느라 빡쳤던 하루를 토닥여 주는 마무리 차로도, 혹은 한 순간 '매우 위험 수준'의 빡침에 압도 당해 사무실을 뛰쳐나와 카페 구석자리에 잠시 처박혀 있을 때에도, 아니면 직장상사(당신이 막내라면)나 막내(당신이 상사라면)의 돌발 면담 요청에 아무 대비 없이 회사 앞 카페로 불려나갔을 때에도 캐모마일 차(Tea)를 권한다. 이 차(Tea)는 분명 당신을 깊은 빡침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며 좀 더 쿨한 척할 수 있는 *OL의 품위를 유지시켜 줄 것이다.
- 옆 집사는 줄리
*대행녀 : 광고대행사, 홍보대행사, 마케팅 대행사 등 대행사를 다니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은어
*캐모마일 : 허브차 중 하나로 원산지는 영국. 저먼 캐모마일, 보데골드 캐모마일, 로마 캐모마일, 다이어스 캐모마일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차(Tea)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저먼 캐모마일이다. 정신불안, 불면증에 매우 효과적이며 진경 작용이 있어서 두통/생리통 진정에 도움을 준다. 한 마디로 대행녀 및 워킹맘 등 여성 직장 동지들에게 강추한다.
<줄리가 마시는 캐모마일>
- 캐모마일 + 벌꿀 : 캐모마일 차에 벌꿀을 타서 마시면 향기와 부드러움이 배가 된다.
- 세러니티 : 타바론이라는 차(Tea) 브랜드에서 나오는 블렌딩 티. 캐모마일에 레몬글라스, 페퍼민트 등을 블렌딩 한 차인데 나는 이게 너무너무 맛있다.
*OL : 알죠? 오피스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