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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줄리 Nov 29. 2015

어쩌다 보니 버티고 있더라.

대홍포 당신도?

나는 참 잘도 버텨내고 있다. 직장에서.

가끔 그게 대견하다 느낄 때도 있지만 주로 그것은 내 스스로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정의된다.


어려서부터 나는 부모님께 비추어 '참을성'이 없거나 '변덕스러운' 아이였다. 언니나 오빠에 비해.

그런 평가에 대해 나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이다.

참아내거나 그대로 두기 보다는 새로운 것을 해보고 바꾸어보고 그러다 핀잔을 들어도 그리 속이 상하지 않았다. 툭 털어내고 또 다른 것을 해보면 그만이었으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때도 비슷했다. 직장 사람들과는 아주 쉽게 친해졌지만 그 조직의 일원이 되어 그 자리에 오래 버텨내주는 사람이 되진 못했었다. 그래서 꽤 짧은 호흡으로 직장을 옮겨다닌 것이 반복되었고 더 이상 '쓰지 않는 명함'들과 너무나 사람 좋은 '전 직장 동료'들이 아주 많이 생겼다. (해맑은 자랑질)


그러다 지금의 직장에 다니게 되었는데 별로 걱정을 하지 않으시던 부모님도, 주변 사람들도 오며 가며 한 마디씩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길게 다녀보라는 조언이다. (우여곡절이 물론 있었지만)정말 그들의 바람대로 나는 이 회사에 '뿌리'라는 것을 내려 X연차 X장이 될 때까지 잘 버티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전공을 살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긴 했고 규모가 작아선지 내가 내는 성과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꼭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어도 ㅠㅠ 버텨내는 데에 소소한 모티베이션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버텨가는 내가 늘 낯설다.


몇 달 전 내 버티는 삶의 작고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던져졌다.

팀 내 꼬꼬마가 조용히 나를 불러 미안함에 단호함을 적절히 투시한 어투로 퇴사를 선언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매우 당황한 상태에서 뭐라고 해줄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야기의 골자는 '본인이 하려던 업무의 성격과 너무 맞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다른 것을 도전하고 싶다',  이 회사는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등으로 내가 과거에 했던 말들과 99프로의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멍~하던 나는 참 부끄러운 1차 조언을 했다.

너의 마음 뭔지 잘 알아.
하지만 어차피 어디를 가도 그런 부분은 비슷해.
결국 직장 생활은 잘 극복해가고 잘 버텨가면 되는 거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1차 면담은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움에 우울감이 찾아왔다. 버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남의 변화와 도전을 막아선 것일까? 나도 별 수 없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일까? 젠장...  며칠 간의 심란함 끝에 나는 다시 그에게 면담을 제안했고 그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훨훨 놓아 주었다. 얘야... 오갱끼데스까?


내게 남은 것은 그의 것이 아닌 나의 숙제였다.

버텨내는 삶이 지겹다면 그 버팀을 그만두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고민 따위는 집어치우고 지금의 역할에 충실하면 될 것이다. 이 간단한 숙제에 대한 고민을 나는 여태 하고 있다. 해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기에 복잡한 마음을 품고도 그렇게 잘 버티고들 있는 것이겠지...


치기 어리지만 뜨겁던 '열정'을 '끈기와 참을성'으로 대표되는 어른의 덕목으로 하나씩 치환해가며 자기 자리를 버티고 있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대홍포 한 잔씩 나누고 싶다.


내 지식으로는 연차를 헤아릴 수 없지만 문헌에 따르면 수령이 최소 400년은 된다고 하니 수 백년 간 같은 자리에 지키고있는 여섯 그루의 대홍포 모수는 그야말로 버티기의 고수.

대홍포 (DA HONG PAO) 를 내리고 침향을 피웠다


그도 우리에게 푸념을 할까?

아니면 수백년 묵은 꼰대처럼 굴까? 크큭.


* 대홍포(大红袍) : 중국의 우롱차.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서 재배하는 중국 명차 중의 명차.

중국차는 그렇게나 명차 중의 명차가 많아서 사실 상 뭐가 진짜 명차인지를 잘은 모르겠으나... ^^;

'차의 왕'이라고 부를 만큼 굉장히 유명한 차임에는 분명하다.


'단총차'로써 즉, 한 가지 나무에서만 자라는 찻 잎으로 만드는데 그 모수(어미나무)는 정확한 수령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것으로 총 여섯 그루가 있다. 실제로 가서 보면 무이산의 억센 바위 틈바구니에 붙어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어 참으로 짠~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실제로 오늘날에는 모수로부터 차를 생산하지는 않고 그의 3세대 자녀들(? - 접붙이기를 한)의 잎으로 차가 생산되는데 수요량에 따라가지를 못해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오르고 있단다. 대홍포를 재배하는 농촌의 골목골목에 주차된 차는 모두 벤츠나 BMW 라고 하니... 그 언니 오빠들 참으로 부럽다.


지금까지 2가지 브랜드의 대홍포를 맛보았는데 최근에 들여놓은 삼주실업의 리미티드 에디션 <DA HONG PAO -  Early April 2015>를 기준으로 보자면 가장 중심이 되는 향은 묵직한 단향이다. 탄누룽지같은 구수한 향 뒤에 시트러스한 과일향으로 마무리 되면서 깔끔한 뒷 맛을 느끼게 해 준다.

비싼 차인 만큼 우려낸 찻잎은 버리지않고 잘 말려서 냉장고 탈취재로 사용하려고 한다.


- 옆집에 사는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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