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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귀새끼 Sep 06. 2016

다림질 잡상

잘 다려진 옷이 주는 행복

  저녁에 색시가 블라우스를 다려 달라고 옷을 건넨다. 다음 날 출근할 때 입을 옷이다. 결혼 후 다림질은 늘 내 몫이었다. 가끔 다림질이 필요한 옷을 입는 색시와는 달리 나는 매일 정장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색시보다 다림질을 쉽고 빠르게 잘한다.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시면서, 직장 다니느라 고생하는 며느리에게 셔츠 다림질시키지 말고 돈 주고 세탁소에 맡기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맞벌이였지만 다림질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 어쩌다 한번 아버지의 다림질은 셔츠 한 벌에 30분씩 걸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우리 색시가 그렇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것이 훨씬 낫다. 가사 분담이라는 것이 별 건가, 잘하는 사람, 덜 힘든 사람이 하면 되지. 


  셔츠를 입는 일을 안 한지 벌써 3년 정도 흘렀다. 색시가 건네 준 블라우스도 오랜만에 다리미 코드를 꽂게 한다. 아이들 잠든 뒤에 하는 것이 좋다. 아빠가 하는 일은 뭐든 신기해서 뜨거운 다리미 옆으로 모여들기 마련이다. 다림질조차 신경 곤두세우며 하고 싶지 않다.


  군대 있을 때부터 다림질을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여자들 블라우스는 여전히 어렵다. 얇고 하늘거리는 천 사이로 예쁜 주름을 살리는 일은 바지 다리는 일보다도 난코스이다. 금방 다린 부분도 돌려놓으면 구겨지기 일쑤다. 다른 집안 일과 마찬가지로 다림질도 어지간히 장비 욕심이 생기는 것 중에 하나이다. 색시의 옷들을 다릴 때마다 TV에서 광고하는 스팀다리미가 생각난다. 일 년에 몇 번 안 쓸 생각을 하면 아깝다. 아니, 생기면 자주 쓰려나? 다림질할 때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세탁소 다리미.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손길 가는 곳마다 칼같이 펴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저것만 있으면 훨씬 잘할 수 있으리란 상상을 한다. 전문가의 능숙한 손놀림은 빼먹고 말이다. 마치 사진작가가 들고 있는 일안반사식 카메라와 망원렌즈만 있으면 무엇을 찍던 작품이 될 것 같은 기대와 같다. 


  일주일에 한 번씩 셔츠의 마른 빨래를 쌓아두고 라디오 들으면서 다림질하면 더 재미있는데, 이제 그럴 일도 별로 없다. 이어폰 꽂고 공부하기, 신문 보면서 응가 하기 등등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못하는 내가 거의 유일하게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생각해 보니 나중에 아이들 교복도 내가 다려야 할 터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구겨지고 더러워질 옷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찔하다. 


  다림질은 다리미로 문지르기 전에, 옷을 다리미판에 잘 펴는 것이 중요하다. 초보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옷을 다리미판에 올려두자마자 급하게 다림질을 해서, 없던 구김도 더 진하게 줄 잡히게 만드는 것이다. 뭐든지 순서와 기초 작업이 중요하다는 통찰을 다림질하다가 떠올렸다면 비약이 심하려나? 

 

  끝났다. 살살 옷걸이에 끼우고 색시가 출근 준비하는 방문 손잡이에 걸어둔다. 잘 다려진 옷은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다. 잘 다려진 옷을 입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당신이 기분이 좋으면 나도 기분이 좋다. 잘 다려진 옷 때문에 기분이 좋고, 잘 다려진 옷을 입은 색시가 기분 좋을 것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다. 다림질 5분 만에 행복해졌다. 이 기분이 뜨거운 다리미 식는 속도보다는 오래갔으면 좋겠다. 

  아니야, 다리미처럼 다시 뜨거워지면 되지. 한 벌 더 할까?


 




뜨거워졌다 식었다 다시 뜨거워졌다, 다리미 온도는 그렇게 유지된다.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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