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에게 미안하다
식탁 위에 돼지저금통 하나가 놓여 있다. 빈 저금통. 저건 또 어디서 받았을까? 돈 주고 사진 않았을 텐데. 책꽂이, 아이들 책상, 집 안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저금통들. 사랑의 밥그릇, 사랑의 빵, 언제나 웃는 돼지, 캐릭터 인형 등등 많다. 어디 행사 참석해서 기념품으로 받기도 하고, 교회에서 불우이웃이나 선교단체 후원을 위해 나누어준 저금통이 대부분이다. 그중에 동전 몇 개라도 품고 있는 것은 한두 개뿐. 언제 마지막으로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누가 넣었는지도.
동전이 들어 있는 저금통을 흔들어 본다. 짤그랑 스스슥. 분명 이 안에 들어있는 동전의 개수보다 저금통 수가 더 많을 거야. 우리 집 구석구석을 뒤지면 말이다. 동전을 넣을 때나 흔들 때나 소리는 마찬가지인데, 왜 넣을 때는 땡그랑이었을까. 시답지 않은 의문이 드는 걸 보니 텅 빈 저금통이 역시 부끄러운가 보다. 동전이 들어 있는지는 알아채기 쉽다. 동전 없는 저금통들이 모두 투명하니까. 든 저금통도 싸고 가벼운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녀석이다. 배를 칼로 갈라야 기어이 내용물을 꺼낼 수 있는 저금통 말이다. 햇빛에만 살짝 비추어 보아도 우리의 게으름이 금방 들통난다. 역시 이 안에 든 동전보다 우리 집 저금통 수가 더 많다.
사랑의 밥그릇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면 교회에서 다시 모으기로 하는데, 번번이 너무 적은 액수인지라 기회를 놓친다. 저금통은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은 모양인데, 저금통이 아니 저금통 주인이 공갈빵이다. 동전 한두 개 들어 있으니 너무 창피하다. 미안하다. 그렇다고 지폐를 넣어보겠다는 생각은 어지간히 안 한다.
아이들에게 저축하는 습관을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나부터 동전 모으기에 게으르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웬만한 지출은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어쩌다 지폐를 쓰고 받은 거스름돈 동전도 귀찮으니까 얼른 써버리려고 한다. 아니 더 솔직해 보자. 저금통으로 들어가는 은전들이 아까워서 더 소비한다. 십 원짜리 오십 원짜리로는 이제 어디 살만한 것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아직 백 원 오백 원짜리들은 제법 유용하지 않은가. 직장 다닐 때에는 들고 다니기 번거로우니 책상 위 놓인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제법 큰돈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런 정성도 없어졌으니. 필요하니까 모으기도 하고 필요하니까 써버리기도 하는 역설은 더 이상 게으른 저축습관의 변명이 되지 못하겠다.
솔선수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 숙제를 위해서 동전 모으는 습관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누구는 자녀에게 경제관념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찍 아르바이트를 시킬 예정이라는데, 잔돈 귀한 법부터 알려주지 못하면 나중에 큰돈 아끼는 것은 어떻게 가르칠까. 문득 어릴 적 빨간 저금통에서 동전 빼어가 오락실로 향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과감하게 배는 가르지 못하고, 돼지 등 좁은 틈새 사이로 동전 한입씩 내어놓으라 억지 냈던 때. 몰래 빼먹는 그 맛을 알려주고 싶어서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자 한다면 너무 엉뚱하려나?
자, 그럼 이제 저축을 잘 하기 위해서 예쁜 저금통을 하나 사야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