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요원이니까
노력으로 열세를 뒤집을 수 있다며 눈물, 콧물 빼고 피와 땀 흘리며 고생하지만, 재능의 벽을 실감한다. 나는 항상 그랬다. 한 살 먹을 때마다, 진학할 때마다, 사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주변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가득했다. 패배 의식, 시기와 질투 그리고 좌절. 나를 달래주던 것은 미디어에서 보는 최강자였다. 무리 중에 가장 강한 자, 가장 뛰어난 자. 이런 것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을 보며 대리만족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바라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고 살지 상상을 펼쳤다.
하지만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게 사람이 약아지면서 그렇게 된 것인지, 불만이 많아진 것인지. 왜 저들은 항상 승리할까? 왜 저들은 못하는 게 없을까? 이런 의구심을 가질 때가 늘었다. 내가 알던 흐름과 다른 반전을 기대하기도 한다. 능력자는 늘 승리하는 것이 아닌 패배하기도 하는 그런 장면을 보고 싶다. 오히려 악당으로 지목받은 자가 한 번쯤은 이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콘텐츠를 보게 된다. 하지만 대개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본 영화 <크로스>도 그랬다.
박강무(황정민)는 과거를 숨기고 사는 전직 요원 출신 주부다. 남편인 강무의 행동을 오해한 형사 강미선(염정아)는 강무의 뒤를 쫓다 거대한 사건에 함께 휘말리게 된다.
영화는 어디서 한 번은 봤던 것 같은 전형적인 특수요원 영화 이야기다. 주인공은 정체를 숨기고 평범히 살고 싶어 하지만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숙명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해도 결국 들통이 난다. 나는 참 궁금하다. 특수요원들은 어떻게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을까. 말 그대로 특수하기 때문일까. 비밀 통로도 다 알고, 벙커 위치도 다 알고, 북한에 가는 방법도 안다. 정말 큰 사고가 나도 다치지 않고 살아난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 적도 날고 기는 특수요원이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산전수전 겪은 용병들도 한 방에 떨어져 나간다. 통쾌함과 동시에 허탈감이 찾아온다. 능력자로서 당연하게 승리하는 것보다 패배하는 것이 익숙했던 나였기 때문에 주인공보다 적들에게 감정 이입하게 된다.
기시감에 따른 지루함이 걱정되는 것인지 호쾌한 액션과 함께 이 영화는 웃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색다른 액션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방법이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 전형적인 웃음보다는 할리우드 스타일로 웃기려고 시도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악역들은 무자비하지만 동시에 자기들만의 ‘쪼’가 있다. <킹스맨>에서 본 사무엘 잭슨을 보는 느낌이었다. 할리우드 B급 영화에 나올 법한 유머로 색다른 재미를 추구하지만, 쿠키 영상이 제일 재미있게 느껴졌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를 볼 때 둘리가 마냥 좋은 친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둘리와 친구들에게 당하는 고길동 아저씨가 안쓰럽게 느껴지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고길동 아저씨가 악인은 아니었지만 항상 당하고 뒷수습을 맡는 모습이 예전에는 즐거운 일이었다면 지금은 딱하게 보이니 나도 세월의 풍파를 겪고 있는 중이긴 한가 보다. 이 영화를 보며 주인공들의 통쾌한 승리를 즐기고 싶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당하는 악역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선인과 악인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선을 택하겠지만 실제 인생에서 실패를 자주 맛보다 보니 비슷한 처지인 악한 사람들에게 동정 섞인 눈길이 잠시 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