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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7. 2021

#40 월루의 불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 

태평공주가 앉아 있는 방문이 하나씩 열리고, 검은 비단을 입은 사내가 그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갈색 눈은 공주에게 다가갈수록 점점 살기를 띠며 어두워졌다. 

그런데도 태평공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앞에 놓은 잔을 들었다. 

     

“괵왕! 늦으셨습니다.”     


가늘고 투명한 여인의 목소리가 검기처럼 뻗었다.      


“이리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 줄 알았으면 좀 빨리 올 것을 그랬습니다. 마마!”     


지성은 태평공주 앞에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비는 지금 안채에서 주무시고 계시니. 내일 보내드리지요. 호호!”

“제가 왔으니, 아내는 왕부로 보냈으면 합니다.”  

  

공손한 말이었지만 단호하고 위협적이었다. 

차를 마시던 태평공주의 얼굴에서 갑자기 미소가 사라졌다.      


“급하게 서두르실까? 아직 이야기는 시작도 아니 했소.”

“저에게 급히 하문하실 일이라도. 공주마마시라면 언제든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그렇지 못합니다. 괵왕이 후궁을 거부한 마당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이리 비를 붙잡아 두는 것밖에.”

“후후.”     


지성이 실소했다. 

그녀의 목적은 참으로 한결같다. 괵왕부를 무너뜨리고, 낙양과 장안을 잇는 주요 교통요지인 함곡관을 장악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의 병권마저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사괵,      

 장안과 낙양을 잇는 함곡관부터 동, 서, 남. 북, 낙양을 가로지르는 낙수부터 북으로는 황하에 이르기까지. 낙양과 장안을 둘러싸는 주요 방위지역이었다. 수도를 지키는 가장 최전선이며 황제의 막강한 군사력이 응집된 곳이었다.      


태자와 대립을 하는 이때, 태평공주에게 필요한 단 하나. 바로 군사력이었다. 조정에는 측천무후 때부터 심어놓은 사봉관이 모두 제 사람이었고, 비옥한 토지와 상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무위의 화를 지나면서 중종 때부터 병권을 황제에게 복속시켰고, 지금의 황제 역시 황자나 공주들이 병력을 이용해 금군에 손을 대는 것을 막았다. 


그녀 스스로 병권을 장악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제 사람을 왕비에 앉히거나 후궁으로 들이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지성을 굴복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나이가 든 측천무후는 황족들의 혼인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황족들은 대부분 스스로 혼인을 결정했는데, 지성의 경우에는 부모도 없었고, 딱히 본인도 혼인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혼란의 시기에는 그것이 좋은 이용감이 되었다.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하는 귀족 가문은 많았고, 시시각각 변화에 맞추어 정혼과 파혼을 반복했다.     

그만큼 그의 혼인은 중요한 일이었다.      


당륭정변 이후, 이제 황제의 치세는 안정을 꾀할 때였다. 지성은 태자의 사람이었으나, 괵왕으로서 그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미 후궁의 내정자들도 모두 생각해두었는데 감히,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 천명한 것이다.      

“이는 모두 네가 초래한 일이다.”     


태평공주는 낮게 읊조렸다.      


“고모님께서는 어째서 비를 데려가지 못 하게 하는 것입니까?”

“글쎄! 지금이라도 무진을 후궁으로 들이겠다 약조하면 당장 내어 주마.”

“후후! 원하시는 것이 후궁이었습니까?”

“그래! 나는 원진과 너를 갖고 싶다.”

“이미 곽무진은 내쳐졌습니다.”

“하! 누구 마음대로!”     


태평공주는 쥐고 있던 잔을 내던졌다. 단단하고 반들거리는 바닥에 투명한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왕비가 회임하였더구나.”     


회임이라는 말에 지성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놀람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 회임이라고 하셨습니까?”     


지성의 음성이 낮게 떨렸다. 그녀도 저도 몰랐던 일이었다. 알았다면 절대 오는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다. 모두 제탓이었다. 금전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아쉬워 내내 그녀의 몸을 탐하고 살을 섞었다. 회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를 참아내듯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허면, 홑몸이 아닌 여인을 인질로 삼으신 것입니까?”

“어디, 내가 부른 것이더냐?  재발로 찾아온 것이지!”     


스스로 찾아와 내 앞에 쓰러졌으니, 그 어려운 일이 쉽게 풀리려는 것인지. 태평공주는 희희낙락했다.      


“무진을 후궁으로 데려간다는 조서를 쓰거라. 그리하면 내 지금이라도 비를 내어 주마.”      


태평공주의 눈이 뱀처럼 번들거렸다. 

분명 그게 다가 아닐 터였다.      


“공주께서도 더 이상의 일을 키우지 마십시오! 더는 참지 않습니다.”

“네놈이 감히! 너는 목이 열 개라도 된다더냐?”

“열 개는 되지 않아도 공주께서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지요.”

“죽일 수는 없겠지.”     


그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성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망가뜨릴 수는 있지 않겠느냐.”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쾅! 하는 굉음이 안쪽에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태평공주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월루를 삼킬 것 같은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야!”

“불이야!”     


사방에서 불을 끄려는 사람들로 삽시간에 월루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태평공주를 보좌하는 시녀들이 쏟아져 나와 그녀를 보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성은 그 틈을 타 불이 난 곳으로 내달렸다.     

 

‘무현각의 불과 월루의 불.’     

‘원래 계책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했던 걸 그대로 돌려주는 법입니다’     


저와 태자가 골똘히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그녀의 말에 저와 태자가 크게 기꺼워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성은 꼭 자신이 휘와 배 속의 아이를 저 불길 속에 던진 것만 같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불이 난 곳으로 다가갈 무렵, 휘는 홍비와 함께  못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자!”

“예! 마마!”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온 휘는 눈에 익은 마차가 앞에 있는 것이 보이자, 가까이 다가갔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전하께서 오셨…. 이런!”

“마마!”          


홍비가 말릴 틈도 주 않고 휘는 다시 불이 난 곳으로 내달렸다.      


‘안 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왔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이번 일로 그가 잘못된다면…. 한순간 눈앞에 깜깜해졌다. 


가만히 앉아서 또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평공주가 없애고 싶어 하는 이는 나이기에, 내가 나서면 그녀는 반드시 일을 벌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곳에 예현이 있었다. 짐작은 했었다. 평강리의 무희들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 않은가. 다만,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참담했을 뿐이었다. 담담하여지려 해도 담담할 수 없는 마음.      

게다가 아이라니. 회임을 한 것을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다. 

모두 제 탓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몸이 그토록 곤하고 좋지 않았던 이유. 그리고 응당 있어야 할 달거리가 없었으나, 이는 몸이 피곤하고 좋지 않으면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이 컸다.      


황태의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정신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불길이 아주 훨훨 납니다그려!”


이융기와 그 옆에 있는 우림장군 갈복순은 월루의 불길을 보며 환호했다.      

갈복순, 그는 이융기의 최측근이며, 정변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원래 황제의 만기군대장이었다. 평소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이융기와도 친분이 두터웠고, 무인을 업신여기는 조정 대신들과 위황후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다. 


당륭정변때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대명궁 정문을 열어준 장수 또한 그였다.      

그는 이융기가 태자로 오르자. 우림장군으로 승격되어 태자의 수족이 되었다. 


태자의 최측근이었지만, 평소 괵왕 이지성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내가 얼굴 반반하면 꼭 그 값을 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저는 괵왕전하보다 비 마마가 훨씬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이융기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십니까? 태자전하!”

“일이 잘못된 거 같은데?”

“아니 저 불길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흠….”     


이융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와 괵왕비가 손을 잡고 벌인 일이었다.      


“그나저나 괵왕비께서 아주 인물이십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까?”

“제가 당할 뻔했던 일을 고대로 돌려준 셈이지.”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볼 때부터 알아보았습죠! 그분은 얌전히 왕비 궁에 계실 분이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렇지!”     


이융기의 눈에도 휘는 탐이 나는 여자였다. 후궁 열보다 그녀 하나가 훨씬 가치가 있었다. 

아마 지성이 아니었다면 제가 취했을지도 모르는 여인.      


얼마전에 괵왕부부가 태자를 찾아왔다.    

  

“조정에서 매우 힘이 드시는 모양입니다.”     


지성이 조롱을 담은 어투로 태자를 위로했다.      


“폐하께서 양위를 선언하시는 바람에 더욱 곤란하게 되었다.”     


실제로 양위라는 말이 입에 오르자마자 당파 간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다. 

틈만 나면 저를 물고 뜯어대는 통해 매일 어전회의를 하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앞에 황제가 있건 없건 태평공주 측에서 태자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저는 폐하께서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계시다 사료되옵니다.”

“너까지 동조하지 말아라! 다들 정변을 일으킨 이유가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으로 보고 있거늘. 너마저 그 생각에 보태고 싶은 거냐!”     


지성이 놀리듯 하는 말에 태자는 정색하며 답했다.     

 

“허면 태자 저하의 의중은 어떠하신지요?”   

  

옆에 잠자코 있던 휘가 물었다.      


“태자 저하께서 스스로 태자가 되지 아니하고 싶으나 전하 외에 다른 이가 태자가 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휘의 말에 이융기의 입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다물어지고 말았다.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또한, 지금의 이 혼란을 어지신 폐하께서는 감당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아!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알아서 뒷일도 수습하라는…. 뭐 이런 건가?”

“그렇게 들으셨다면, 태자 전하는 위선자이십니다!”     


휘는 조곤조곤 이융기를 몰았다. 그녀의 위선자라는 말에 태자는 발끈했다.

절대 입에 담지 않는 말이었다. 아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무어라!”

“지금 방금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 실토하지 않으셨습니까? 애초에 태자 자리도 황위도 욕심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지지요.”     


그녀의 말에 기어코 지성이 실소를 터뜨렸다. 남이 들으면 감히 태자 앞에서 태자의 위치나 황위를 논하기에 당장 끌려가 참수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융기에게 있어 그들은 예외였다.      


“부창부수라더니, 어째, 혹을 떼려다 하나 더 달린 느낌이 드는군.”    

 

이융기는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양위를 받아들이십시오!”     


지성은 웃음을 멈추고 다시 말간 얼굴로 돌아와 태자에게 읍했다.      


“흠…!”

“평강리를 저대로 두었다만 장안이 분명 사분 오 할로 나뉠 것입니다!”

“알고 있다.”     


그는 지성을 나무라지 않았다. 저라고 생각이 왜 없을까. 태자가 됐으니 황위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시기가 중요한 것.      


“이대로 두면, 이 나라는 망할 겁니다.”     


휘의 말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묵직하게 파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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