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가는 물고기 Apr 01. 2021

#50 소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낙수 위에 노을이 피처럼 붉게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하는 시인도. 놀이배도 가인을 태운 뱃사공도 보이지 않았다.


낙양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휘는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건안성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라면,


낙양은 그녀가 품은 애증의 땅이었다. 지나친 화려함이 싫었으나 그조차 사라진 낙양은 더욱 싫었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몇 년에 걸쳐 일어난 재해와 상인들의 횡포로 황폐해지고 있었다.      


“이곳은 오직 그대에게만 허용되는 곳인가?”    

 

지성은 멍하게 있는 그녀를 제쪽으로 잡아 당겼다.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고집을 피우기에 이곳까지 왔으나….”     


그의 말투에 걱정이 가득 묻어있었다.

사타무의를 굳이 이곳에서 만나야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정작 이곳에 오니 후회가 밀려왔다.


굳이 마음 속 깊이 꺼내어 보고 싶지 않던 감정이 튀어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잘못하였지요.”     


지성은 순순히 저의 잘못을 인정하는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을 놓고 그녀를 앞으로 ㅇㅇㅇㅇ돌려 세웠다.     

 

“어째서 그리 말을 하는 거요?”

“괜히 왔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볼멘 소리가 튀어 나왔다.      


“힘드십니까?”     


혹여라도 불편할까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려 했다.   

   

“영노께서는 알고 계셨던 겁니다.”     


그녀의 말 속에 물기가 촉촉히 배어 있었다.      


“그가 예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갈 수 없음을 말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솔직히 이곳까지 따라오면서 지성은 내내 불편한 마음이 일고 있었다.

사타무의와  그녀 사이에 느껴지는 끈끈한 무엇이 저는 절대로 알 수 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이름에 찍혀진 낙인 때문이지요.”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팔아 살아 남은 자!’

나라가 망하고 왕과 함께 포로로 이 나라에 끌려온 이들에게 분노는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명광현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삶의 의욕을 놓고 송장처럼 살다 죽어갔다.      


왕이 죽었고, 그들의 분노는 갈 곳을 잃었다. 나랏님을 탓해야 했으나 탓할 나라님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장군이 있었던 것이다. 왕을 끌어낸 자. 더 나아가 나라를 팔아 호위호식 하는 배반의 낙인을 찍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미움의 대상이 필요했다.


예식진은 죽을때까지 왕을 대신에 유민들의 분노받이로 살았다.  죽어서 조상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다하여 묘비명에 제 이름 석자만 새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자손에게까지 낙인을 물려주는 것은 너무하군.”     


이름 앞에 낙인이 찍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사타무의라는 가면 안에 그토록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것을 보아버린 것이 살짝 억울했다.     


“그대말처럼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지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한번도 그를 보며 불쌍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그 천연덕스러움에 혀를 차고, 오만함에 살의를 느꼈다. 게다가 태평공주와 살을 맞댄 자가 아니던가. 더럽고 추악하단 생각에 이르자 그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추악함으로 따지자면 이 당나라에서 저를 따라올 사람이 있을까.      


“그 덕에 건안성의 대방군께서 두 다리 펴고 사셨겠지요.”     


나라가 망하면 그 책임은 왕실에 있다.

그렇다면 그 원망의 대상도 당연히 건안성으로 향하는 것이 맞았다.


예식진이라는 사람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썩어서 진물도 나지 않는 부여가문을 그렇게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여씨가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겠지.”

“나라가 망한 뒤에 남은 왕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건 그렇지 않소!”     


저 멀리 그들을 기다리는 마차가 보였다.

지성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비록 멸망했다 하여도, 왕실이 남아 있으면 희망이라는 것을 품을 수 있지 않소?”

“헛된 희망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차갑게 변하고 있었다.      


“헛된 희망이라도, 그대들이 있기에 건안성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오.”

“변방의 화살받이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까?”     


 그녀의 입에서 조소어린 비난이 터저나왔다.

휘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백제인들이 건안성으로 터전을 옮기고 나서 동북의 변방은  눈에 띄게 안정됐다. 중앙에서 멀어진 부여씨들은 그곳에서 나름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고, 유민들은 전과 다름없이 그들을 따랐다.      

“부인!”     


 차갑게 변해버린 휘의 태도에 지성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왕부로 돌아 오는 내내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혼인을 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그들 사이에 냉기가 흘렀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들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차가 왕부에 도착하자 찬비가 그들을 맞이했다.      


“마마! 전하와 즐거운 산책을…..”     


들떠 있던 찬비의 말 끝이 금방 흐려졌다.

마차에서 내려 그녀 앞을 쌩하고 지나는 휘의 몸에서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지성 또한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분명 나갈때는 서로 꿀 떨어지는 눈을 하고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싸우기라도 했을까.

호기심과 궁금증은 절대로 참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당장 쫓아가려고 하는데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아이씨! 바빠죽겠는데 누구야!”     


찬비는 뒤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너는 지금 가서 아궁이에 불을 넣고, 왕비께서 좋아하시는 다과를 준비하거라!”     


그녀는 이내 제 입을 틀어 막았다. 제 뒷덜미를 잡은 이는 누구도 아닌 이 왕부의 주인이었다.      


“예? 예. 예 전하!”     


그녀는 지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리나케 모습을 감췄다. 지성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휘의 뒤를 쫓았다. 그리 빠르지 않은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백목당 문이 열리고 휘는 무거운 몸을 내려 따뜻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찬비야! 시비들에게 일러 아궁이에 불을 좀 더 넣어라!”     


말을 끝내고 옷을 벗고 돌아서는데, 지성이 제 뒤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불을 넣으라 시켰으니 조금 있으면 따뜻해 질 것이오.”     


지성은 시큰둥한 눈을 저를 보는 그녀를 지나쳐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왜 여기 계십니까?”

“부인께서 이리 화가 나 계시는 데 어찌 돌아갑니까? 그리고.”      


그는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내 방은 이렇게 따뜻하지 않으니 말이오.”     


낙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백목당에 온돌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침대를 데워 놓는다 해도 건안성에서 지내던 더운 방바닥 보다 못했다.


기어코 그녀는 백목당에 아궁이를 만들고 굴뚝을 세웠다. 그 덕에 홍비와 찬비는 아궁이를 이용해 간단한 음식도 만들 수 있었기에, 추운 겨울에 어선방까지 이어진 긴 회랑을 건너도 되지 않았다.      


휘는 아무 말 없이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과 이어진 창을 열자 이제 막 겨울 초입의 맑은 풀내음이 방안에 가득 퍼졌다.      


“화가 나셨소?”     


지성이 물었다.      


“화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즉답했다.      


“다만?”     


그가 재차 물었다.     

 

“좀 서글펐습니다.”

“내가 적국의 황족이라서?”     


지성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이제야 내내 들었던 의문이 풀렸다. 부여 휘와 사타무의,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던 이질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당나라 황족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망국의 유민,     

 

“전하!”

“잘 들으시오.”     


그의 유리알처럼 투명한 황갈색 눈동자가 붉게 타는 듯했다.      


“때로는 헛된 희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법이오! 거기에 기대서 살 수만 있다면….”     


자신은 부여 휘라는 여인을 만나기 전까지 헛된 희망조차 꿈꾸지 못했다.


선택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표도 없었고. 존재해야 하는 희망조차도 없었다.      


“나에겐 그대가 희망이고, 살아야 하는 목적이라오.”     


쿵!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자 배안에서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이가 요란하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훅! 몰아 쉬었다. 그 어떤 사랑의 밀어보다 제 마음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한 사내의 희망이고, 삶의 목적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벅찬 감동일까.


휘는 그가 오로지 그녀만을 그 품에 담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하!”     


어쩔 수없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의 삶이 평탄치 않았음을 그녀 또한 모르지 않았다.


세상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그 이면에 가진 참혹함이 그녀를 뒤흔들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대당의 황족이었다. 권력앞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가 변하고 있었다.

 저를 위해, 아이를 위해 그가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자전하께서 납시었사옵니다!”     


장소는 문틈으로 조용히 기척을 냈다.

태자가 야심한 시간에 지성을 찾는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지성이 바로 일어났다. 그녀가 따라서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하자 그가 그녀를 도로 자리에 앉혔다.     

 

“다녀오겠소.”     


그녀는 앉은 채로 지성을 배웅해야 했다.

이 시간에 태자가 왔다면 분명 급한 일이였을 거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마마!”     


어느결에 그녀 곁에 홍비가 가까이 앉았다.      


“왜 그러느냐?”

“돌아가는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무엇이?”

“장가가 정말로 왕부의 후궁으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그럴테지!”     


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내내 끙끙대며 눈치를 보는 것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어서 말하여라!”

“그것이….하필 이때에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지라…”     


소문?      


소문이라면 팔할이 꾸며낸 것이라고 할 만큼 대부분 어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안이나 낙양에 도는 소문이라면 대부분 의도가 다분이 숨어 있는 것.  

    

“지금 괵왕부에 곧 정실 왕비가 바뀔거라는….”

“바뀐다?”     


엄연히 황제에게 책봉을 받은 저를 두고 누가?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화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리숙하고 욕심이 많아도 지성을 마음에 둔 여인이었다.


이렇게 뜬금없는 소문을 만들어 낼 만큼 재간이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 한사람.

그러나 태평공주라고 생각하기에는 소문의 내용이 너무 직접적이다.

태평공주가 소문을 냈다면 이렇게 유치하지는 않을 터.      


그러니 걸러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곽무진. 그녀가 오라비에 의해 왕부에서 나간 뒤로는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집안에서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었다는 말도 들었고, 옥진 공주가 만든 도관에서 향락에 빠져 산다는 말도 얼핏  들리는 듯했다.      


비구니와 도관.


섬광을 스치듯 그녀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혜범의 꼬리를 아무리 찾으려해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혜범이 보이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은 곳에 그녀가 있을 지도.          

작가의 이전글 #49 날으는 불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