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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Jan 28. 2023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5)

 스승에게 철학을 배우게 되면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게 잘 안돼요"

"제 마음은 그런데, 그게 잘 안돼요"


수업을 듣다 보면 뭐 하나 쉬운게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푹푹 쉬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단점까지도 예쁘게 껴안아 줄 수 있어야 한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의 가장 소중한 걸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배운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면 어른인 척 하는 효자 효녀 행세는 집어치우고 온갖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감정적인 해소를 해 봐야 한다거나, 다이어트를 하고 싶다면 적게 먹고 많이 운동하면 된다거나, 운동을 잘하고 싶다면 잘하든 못하든 시키는 운동을 꾸준히 해 본다던가, 학벌 컴플렉스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붙어봐야 한다고 배운다.


어떤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할 때 우리는 대부분 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도 스승에게 질문을 할 때 답을 이미 알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 과정이 고되고 힘들어서 그런 수고를 감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자신이 없어 불안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확인받고 안심하기 위해서인 경우이거나. 즉,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이 잘 따라주지 않을 때 푸념하듯이 조언을 구하게 된다. 그럴 때 스승의 답변을 들으면 "내 마음은 그런데 잘 안된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걸까?


"우리는 생명체를 주변 대상들이 그에게 미치는 작용이 그 대상들에 반사되는 일종의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런 반사에서 외부 지각이 성립한다. ...<중략>...그것은 작용을 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투쟁하며 그리하여 그런 작용의 무언가를 흡수한다. 거기에 정조 (감정)의 원천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각이 신체의 반사력의 크기를 나타낸다면 정조 (감정)는 그것의 흡수력의 크기를 나타낸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을 더 자세히 보고 정조 (감정)의 필요성은 지각 자체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물질과 기억> 105 p, 앙리 베르그손
"... 이제 한계에까지 가서 거리가 없어졌다고, 즉 지각할 대상이 우리 신체와 일치한다고, 즉 우리 자신의 신체가 지각할 대상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때 그 매우 특수한 지각이 표현할 것은 더 이상 잠재적 행동이 아니라 실재 행동이다. 정조 (감정)는 바로 거기서 성립한다. 따라서 우리의 기분 (감정, 정조)과 우리 지각의 관계는 우리 몸의 실재 행동과 가능적 혹은 잠재적 행동의 관계와 같다. 몸의 실재적 행동은 다른 대상에 관계된 것이며 그 대상에 그려진다. 몸의 실재 행동은 몸 자신에 관계된 것이며 따라서 몸에 그려진다." <물질과 기억> 106 p, 앙리 베르그손


베르그손은 이원론자이다. 즉, 정신물질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베르그손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다르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정신을 더 근본적이고 완전한 실체로 보았고 육체는 정신과 이성의 작용을 방해하는 불완전한 실체로 보았다. 베르그손 역시 정신과 물질이 개별적인 실체라고 보았지만 신체의 중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원론의 두 축인 정신과 물질을 접근시켜 그것들을 결합시킨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각은 몸의 외부 세계와 관련을 맺는 과정이다. 외부 자극이 몸으로 들어와 그것이 운동의 형태로 바깥으로 되돌려지는 것이 지각이다. 그리고 그 지각의 과정에서 물질과 신체의 거리가 0이 될 때, 우리는 감정 (정조)을 느끼게 된다. 즉, 지각이 일정 강도를 넘어서면 감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과 지각의 관계는 우리 몸의 실재 행동잠재적 행동과의 관계와 같다. 이를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풀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우리들 각자 속에서 정신과 육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가정할 때, 육체에 대해서도 정신에 대해서도 그들 사이에 유지되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제 우리의 가정은 어디에서 성립하고 정확히 어떤 점에서 다른 것과 구별되는가? 그것이 다른것이 아닌 그것이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정조 (감정)에서 출발하는 대신 우리는 행동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가 가진, 사물 속에다 변화를 수행하는 능력, 유기체의 모든 능력이 수렴하는 것으로 보이며 의식에 의해 입증되는 능력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번에 연장된 상들의 총체 속에 자리 잡고 그런 물질계 속에서 바로 생명에 특징적인 비결정성의 중심들을 본다." <물질과 기억> 115 p, 앙리 베르그손


어린 시절 나는 통통했다. 심각한 비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초등학교 신체검사 성적표에 늘 '경도비만' 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허벅지와 엉덩이에 살이 튼 자국이 남아있다. 거울을 보기가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거울 속 나는 절구통 같은 허리에 퉁실퉁실한 엉덩이 그리고 코끼리 다리 같은 허벅지와 고구마 같은 발목을 가진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를 사랑해 줄 남자는 아무도 없을것만 같아 늘 우울하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외부 물질들을 지각하는데에 그쳤기에 아무런 실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날씬하고 매끈한 여성들의 육체들이 더욱 눈에 띄었다. 그만큼 뚱뚱한 내 몸이 더욱 볼품없이 느껴졌다. 나도 연애라는 걸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스무살 초반 처음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해야 할 학창시절에도 체력이 약해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이라도 외부 활동을 하는 날에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졸곤 했다. 그랬으니 몸을 움직이는 것을 즐겼을리가 없었고 운동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학교 다닐때에는 체육 시간이 두려웠다. 반 친구들과 팀을 짜서 발야구나 피구를 할 때 나는 항상 제일 먼저 탈락하거나 구석에 처박혀 망부석이 되기 일쑤였다.


운동 뿐만이 아니었다. 몸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지 자신이 없어 주눅이 들었다. 중학생 때 담임 선생님의 생일 공연으로 반 아이들과 함께 소녀시대 노래에 맞춰서 안무를 연습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동작이 헷갈렸고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나 때문에 연습이 끊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때 반 아이들이 춤 연습을 할 때면 나는 따라하지 못해 늘 애를 먹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몸치였고 앞으로도 평생 뻣뻣한 목각인형처럼 살아야 한다고만 생각해서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평생토록 뚱뚱한 여자, 저질 체력, 몸치로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운동을 잘하게 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게 나의 바뀌지 않는 미래라고만 생각했다.


저주받은 몸뚱아리였지만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시대 사람들이라면, 특히나 여자들이라면, 다이어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거라고 생각한다. 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마른 몸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평상시에 먹는 음식 하나하나 가려 먹었던 기억이 난다. 식사는 아침, 점심, 저녁 순으로 적게 먹을 것. 세 끼 중 하루는 꼭 샐러드를 먹을 것. 밥은 반 공기 이하로 먹을 것. 밥 대신 야채가 많이 들어간 반찬으로 배를 채울 것. 맵고 짠 음식은 피할 것. 국물은 먹지 말고 건더기만 먹을 것. 밀가루 음식 특히 면이나 빵은 피할 것. 커피는 무조건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아메리카노만 마실 것. 술을 마실 땐 안주를 먹지 말 것. 너무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아침에 먹을 것 등등. 이런저런 제한 조건들 때문에 언제나 식사 메뉴 고르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뭔가 먹고 싶어 편의점에 들어섰다 10분 넘게 고민하고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던 적도 숱하게 많았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많이 먹게 된 날에는 아파트 14층을 계단으로 두번 오르내리고서 귀가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매일 자전거로 학교를 출퇴근하고 새벽요가와 저녁요가 수업 두 타임을 들었다. 당시 나는 요가에 빠지게 되었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요가를 통해 몸매가 정돈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딜가든, 심지어 여행을 가더라도 요가를 꼭 하고 자야 마음이 놓였다. 하루라도 요가를 하지 않는 날에는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또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등산을 하거나 마라톤 대회를 나가거나 자전거 종주를 하는 등 데이트 시간의 많은 부분을 운동에 투자했다. 많은 부분 왜곡되고 뒤틀어졌긴 했어도 어찌됐든 살을 빼겠다는 일념으로 잠재적 행동에서 '다이어트' (식이조절과 운동)라는 실재적 행동까지는 이끌어 낸 셈이었다.


그런데 나의 다이어트는 건강한 방식이었을까? 아니었을테다. 나는 음식과 운동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라는 철학자가 정의한 인간의 46가지 감정 중 '미식욕' 이라는 감정이 있다.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나 사랑. 그 당시 나는 미식욕의 노예였다. 내가 나름대로 치팅데이로 정했던 날이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날이었다. 그 하루를 위해 SNS로 맛집 포스팅을 보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는데에 자투리 시간을 모두 소비했다. 그 당시 내 블로그나 페이스북에는 온통 맛집 포스팅으로 가득차 있었다. 일주일에 한 끼 밖에 없는 먹고 싶은 것을 먹는 날이었으므로 선택에 만전을 기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먹고 싶어서 뭘 먹어야 할지 고르는 시간들이 고통스러웠다. 음식을 먹을 때면 내 앞에 있는 남자친구는 사라지고 눈앞에 있는 음식을 입에 쑤셔넣기에 바빴다.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먹는 내 모습이 추해 보일 것 같아 걱정도 됐지만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남자친구가 말을 걸면 눈은 그를 보며 대화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다음엔 어떤 접시에 수저를 가져갈까하는 고민 뿐이었다. 엉거주춤하게 손에 쥐어진 수저가 허공에서 민망한듯 고개를 까딱거리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의 내가 완전히 다이어트 강박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살이 찔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건강한 음식들을 골고루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이 다이어트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지금은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 자체가 목적이고 다이어트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사이드 이펙트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다시 베르그손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에 따르면 정신과 육체의 관계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지각 (잠재적 행동)감정 (실재적 행동)이 되어 육체의 변화를 야기하게 된다. 분명 나는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 강박에 얽매여 음식과 운동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가끔은 먹고 싶은걸 먹어도, 운동을 빼먹어도, 생각했던 것처럼 몸무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또 요가를 하면 일상 스트레스도 줄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저런 운동을 접하면서 몸의 움직임도 좋아지고 운동 능력과 체력이 향상되기 시작했다. 운동을 즐기게 되면서 운동 후에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이 컨디션을 더욱 좋게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런 음식들을 다이어트 목적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찾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몇키로씩 널뛰던 몸무게가 일정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고 체형도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체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다이어트라는 행동이 실제 육체의 변화를 가져왔던 셈이다. 그렇게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저주받은 몸뚱아리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들이다. 이십대 초중반 몸매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길거리의 여자들을 보면 그 여자가 말랐는지 뚱뚱한지 다리가 예쁜지 아닌지만 보였던 기간도 꽤 길었다. 그런 것 치고도 나는 한국 평균 여성들보다는 살에 대한 집착이 적었던 편이었다. 누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날씬하고 마른 몸에 대한 집착을 양산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다이어트 강박으로 마음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나는 운이 좋아서 쉽게 그 지옥에서 벗어났을 뿐이다. 나는 나의 노력 없이도 좋은 조건에서 자라왔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것도 조금은 알고 있다. 내가 다이어트 강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정부분 나의 행동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나만의 행동과 노력으로 인해 이런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순수한 상태에서의 우리의 지각은 진정으로 사물의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기분은 의식의 심부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서 약화되면서 공간에 펼쳐지기는커녕,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상들의 한가운데서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몸이라 부르는 특별한 상이 겪는 필요한 변화들과 일치한다" <물질과 기억> 117 p, 앙리 베르그손


내가 다이어트에 한창일 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살 안 빼도 돼" "너는 먹을 때가 제일 예뻐" 라고. 심지어 그는 내가 뱃살이 있을 때 더 섹시하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자취를 하던 그가 요리를 할 줄 몰랐던 나에게 손수 이런 저런 요리들을 해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런 저런 운동을 할 때에도 그는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난생 처음 나가본 마라톤 대회도 그가 제안했던 것이었고 서울에서 춘천까지 자전거 종주 여행이도 그의 제안이었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던 나는 그가 하는 말들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뚱뚱한 것보다는 날씬한 나를 좋아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랑비에 옷젖듯 그의 아낌없는 사랑을 조금씩 흡수했던 탓일까,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의 마음이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는 정말 내 몸이 통통과 날씬을 오고 가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나에게 예쁘다고 해 주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대상의 상은 표상 (정신)과 사물 (물질) 사이에 진동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다. 이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물체를 초고도 현미경으로 근접 촬영했을 때 표면이 진동하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고 한다. 기분이나 감정 역시 일종의 파형이다. 외부 대상의 진동이 내 몸의 진동에 영향을 미쳐 변화된 파형이다. 나도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고 상대방도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인간은 교감의 동물이다. 남자친구가 나에게 주었던 사랑의 진동만큼 내 몸의 진동도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준 사랑 덕분에 미식욕과 날씬한 몸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승의 말이 맞다. 마음은 없다. 행동이 곧 감정일 뿐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감정보다 지각이 더 근본적이고, 지각 보다는 행동이 더 근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행동이 가장 우선해야 한다. 나의 행동은 어떠한 실재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마중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이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번에'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이전에 나에게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이 수단이고 다이어트가 목적이었던 것에서 운동과 건강한 식습관 자체가 목적이 되었던 과정처럼 모든 실질적 변화는 지난한 반복들을 거쳐 일어난다. 이것은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희망적인 삶의 진실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쉽게 얻은 것은 반드시 쉽게 잃는다. 그만큼 오래 걸려서 얻어낸 것은 쉽게 잃어버리지 않는다. 인간이 오랜 시간 걸려 이족보행을 하는 생명체로 진화한 뒤 다시 이족보행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특정 방향을 향해 행동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이다.


삶은 단순하지 않아서 일차원적인 행동만 가지고 어떤 상황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우리가 "제 마음은 정말 그런데, 그게 잘 안돼요" 라는 말을 그토록 많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 기쁜 삶을 살고 싶고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니까. 그러나 삶은 변수가 하나인 함수가 아니다. 만약 남자친구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까지 더 극심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타자의 진동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타자의 진동은 또한 나의 진동에 영향을 받는다.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나의 행동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서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있다면 나의 행동, 나아가 나의 진동을 잘 추스르고 다독여야만 한다. 그렇게 기쁨을 가득 채워서 맑은 진동 (주파수)를 가지고 그를 만나야 한다. 남자친구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었던 것처럼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영향을 미친 적이 있었을까?


언젠가 스승이 말한적이 있다. 내 마음은 쬐끄만 호수인데 그 밑에 항공모함 모터가 돌아가고 있다고. 그만큼 나는 자주 불안함에 잡아먹히곤 했다. 여태까지의 나는 순전히 나의 고통 때문에 내 불안과 혼란을 잠재우기에 급급했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받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사람만을 찾아다니고 그에게 의존하기 바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의 불안정한 주파수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말이다.


여전히 나는 불안에 흔들리고 내 주파수는 누군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만큼 좋은 진동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나의 주파수를 정돈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럴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의 고요한 마음으로 요동치는 너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은 그런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너의 말을 진심으로 아프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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