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수업 후기 (6)
"기억, 즉 과거 상들의 존속을 놓으면 그 상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현재 지각에 섞일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자"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18 p.
처음 베르그손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말과 다름 없으니까. 삶이 즐겁지 않았고 내일이 기대되지 않았다. 내 과거는 모두 실패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으니 나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실패할 것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 일이 잘 풀리는 경우에도 '내가 이럴리가 없는데. 이건 운이 좋았을 뿐이야. 분명히 내가 망치고 말거야' 라는 생각을 했고 그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안돼' 라고 부정적인 자기 확신의 과정을 반복했다.
과거를 기쁘게 기억하는 사람은 현재를 기쁘게 지각하고 슬프게 기억하는 사람은 현재를 슬프게 지각한다. 베르그손 수업 시간에 스승이 지각과 기억의 관계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관계를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한 부분이 마음에 와닿았다. 뫼비우스 띠의 안쪽 면을 따라 가다보면 바깥쪽면이 나오고 바깥쪽 면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안쪽면을 맞닥뜨린다. 처음 뫼비우스 띠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섬뜩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마치 미궁처럼 느껴졌다. 영영 탈출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같았다.
예전의 나라면 스승의 그 비유에서 좌절감만 느꼈을테다. 기억은 끊임없이 우리의 현재 지각에 섞일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을 대체한다. 뫼비우스 띠의 안쪽 면을 기억 (과거)으로, 바깥쪽면은 지각 (현재)이라고 가정하면 기억이 지각을 끊임없이 대체한다는 베르그손의 말이 비극적인 신탁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과거에 슬픈 기억이 대부분이라면 (안쪽면) 그 기억을 따라 지각하는 현재 역시도 슬프게 지각될 것이고 (바깥쪽면), 다시 미래의 시점에서는 그 지각된 현재가 과거가 되고 슬픈 기억으로 남고 (안쪽면), 그 슬픈 기억으로 인해 다시 현재를 슬프게 지각하게 되고 (바깥쪽면)... 이렇게 무수히 반복될 것으로 생각할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불행한 기억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삶에 대한 나의 인식을 통해 잘 드러난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내 삶의 조건은 불행보다는 행복에 가까웠다.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고 경제적 형편도 넉넉했다. 학창시절 때까지 큰 고민이라고 해 봤자 공부와 교우관계 정도였다. 명문대까지는 아니어도 평균적인 대학에 진학해서 대학 생활의 즐거움도 적당히 누렸다. 연애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었던 악기도 배워보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며 꽤 많은 경험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부모님의 지원 덕분에 대학원도 졸업하고 유학 준비를 해 보기도 했다.분명히 나에게는 행복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사랑받았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의 기억은 그런 기억들은 날려버리고 불행하고 슬픈 기억들로만 점철되어 있었다.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보면, 내가 가지고 있던 내 삶에 대한 느낌이 비이성적으로 느껴진다. 나 스스로도 그랬다. 사실은 내가 기억을 그렇게 편집한 것이다.
반대로 스승은 객관적으로 나보다 불행한 삶의 조건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삶을 불행하거나 슬프다고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삶을 살다 간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평생 집다운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보다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평생을 개처럼 자유롭게 살았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승과 디오게네스는 과거를 슬프기보다는 기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과 사실은 다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기억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에 가깝다.
요즘 베르그손의 '지속'과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얼마 전 <낯설고 먼> 이라는 단편영화를 봤다. 비슷한 시기에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라는 단편 소설을 읽었다. 두 작품에서 모두 주인공은 영원히 반복되는 사건과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에서는 아빠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는 엄마와 아들이 나온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빠는 결국 엄마를 살해하고 아들은 아빠를 살해하고 자살한다. 죽어가며 아들 세호는 원치 않았던 비극적인 결말을 되돌리고 싶어한다. 의문의 목소리가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있는 3번의 기회를 주며 "어느 때로 돌아갈래?"라고 묻는다. 세호는 아빠가 엄마를 죽이기 전으로 돌아가지만, 아빠는 '그 날' 이 아닌 '다른 날'에 다른 방법으로 엄마를 죽인다. 세호는 좌절하며 다시 과거로 돌아갈 2번째 기회를 사용한다. 그는 아빠와 엄마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던 시기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빠를 죽인다. 그 순간 그가 돌아본 곳에 엄마가 서 있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의 텅 빈 눈을 바라본 아들은 절망한다. 그가 원했던 결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다시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다. 이번엔 그들이 사랑에 빠지기 전. 그들이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세호는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아빠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를 쓴다. 엄마가 시골로 내려갔을 때 아빠를 죽인다. 그런데 그는 아빠를 죽이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자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희는 대학 때부터 누군가 자기를 감시한다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불안감이 극심함에 달해 도움이 필요하던 순간 찬석이 구세주처럼 나타나 그녀를 도와준다. 영희와 찬석은 사랑에 빠진다. 찬석은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둘의 사랑이 무르익을 때쯤, 영희를 따라다니던 스토커가 찬석을 죽인다. 의문의 목소리가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있는 3번의 기회를 주며 "어느 때로 돌아갈래?" 라고 묻는다. 영희는 스토커가 찬석을 죽이기 전으로 돌아가지만, 찬석은 '그 날'이 아닌 '다른 날'에 스토커가 휘두른 칼에 죽는다. 영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갈 2번째 기회를 사용한다. 애초에 찬석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그녀는 학교에 남지 않고 시골의 부모님 집으로 내려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울 모 대학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뉴스로 접한다. 사망자 사진에는 찬석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다. 찬석을 살리기 위해서는 스토커를 죽일 수밖에 없다. 스토커가 찬석을 공격하려던 그 순간 영희가 스토커를 먼저 죽인다. 죽어가는 그의 눈을 보며 영희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찢어지게 고통스러워 통곡한다.
영희와 찬석은 세호의 엄마 아빠였다. 영희를 따라다니던 의문의 스토커는 그 둘의 미래의 아들인 세호였다. 그들은 과거에서 온 자신의 아들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었다. 영희는 아들이 커가면서 자신을 따라다니던, 찬석을 2번이나 죽이고 마지막엔 자신이 찔러 죽이기도 했던 스토커의 얼굴을 닮아가는 것 같아 무섭다. 커가며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다. 세호는 엄마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젊었을 때엔 따뜻하고 자상했다던 아빠가 사업의 실패로 인해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결국 찬석은 영희를 죽이고, 세호는 찬석을 죽인다. 흐릿해져가는 시야를 통해 보이는 세호의 얼굴을 보며 영희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의문의 목소리가 비웃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낯설고 먼> 에서는 한 흑인 청년 (카터)이 나온다. 그는 매력적인 여성과 만족스런 잠자리를 하고서 단잠을 자고 일어난 참이다. 아침에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호감도를 탐색하기도 한다. 다음번에도 또 만나기를 기약하며 여자의 집을 나온다. 남자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다. 그의 집에는 그를 기다리는 개가 있다. 그는 개를 사랑한다. 개는 그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는 개에게 돌아가야 한다. 집에 가기 위해 길거리로 나온 남자는 담배를 피우다가 백인 경찰에게 마약 사범으로 의심받는다. 그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협조를 강요하는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백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그는 잠에서 깬다. 다시 매력적인 여성의 집 침대 위에서. 모든 것이 데자뷰처럼 반복된다. 그녀가 했던 농담도 물컵을 떨어뜨리는 것도 모든 것이 똑같다. 길거리를 나와 어떤 남자와 부딪히는 것도 똑같다. 그리고 그는 또 경찰의 과잉 진압에 질식사를 해서 죽는다. 다시 매력적인 여성의 집 침대에서 잠이 깬다. 그리고 99번 동안 그 어떤 다른 시도를 해도 그는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100번째 시도. 그는 백인 경찰에게 모든 사실을 말한다. 이 모든게 반복되어 왔으니 이 지긋지긋한 미궁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믿든 믿지 않든 집까지 태워나 달라고. 가는 길에 이야기나 해 보자고 말을 건넨다. 카터가 하는 말들이 그대로 일어나는 것을 본 백인 경찰은 그를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속는 셈치고 그를 태워다 주기로 한다. 카터의 집으로 가는 길 그는 백인 경찰을 이해해 보려고 애쓴다. 그가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 그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차 안에서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들은 흑인과 백인이 아닌, 약자와 권력자가 아닌 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다. 둘은 인사를 한다. 그리고 카터가 집을 향해 걷는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장면이 교차해서 나온다. 그 때 백인 경찰이 등 뒤에서 박수를 친다. "이번거 정말 재밌었어. 친근하게 굴면서 내 본성의 선한 면을 끌어내려 하는게 정말 끝내줬어. 넌 용기가 부족한 적은 없었지. 시간이 부족했을 뿐... 역사에 남을 호연이었어. 정말 최고야." 라고 말한다. 총이 발사되고 카터는 죽는다.
카터는 다시 여자의 집에서 잠이 깬다. 100번째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여자에게 한다. 그 어떤 수를 써봐도 소용이 없다는 걸 카터도 알고 있다. 백인 경찰은 그저 그를 죽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카터는 백인 경찰보다 빠르고 똑똑하다. 몇 번을 반복하더라도 그는 방법을 찾을거라고 다짐한다. 어떻게 해서든 강아지에게 돌아갈 거라고.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와 <낯설고 먼>이 비슷하면서 다르다고 느껴졌다.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유도 없이 폭력을 당했고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전자의 작품에서는 불행한 과거가 영원히 되풀이되고 점이 찍힌 자리에서 그쳐버리고, 후자의 작품에서는 불행한 과거가 영원히 되풀이 되지만 점이 찍힌 그곳에서 새로운 선이 그어진다. 3번의 기회보다 더 많은 시간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도 막다른 점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낯설고 먼>에서 카터의 100번째 죽음에서 백인 경찰은 카터에게 "넌 용기가 부족한 적은 없었지. 시간이 부족했을 뿐" 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시간'은 정말 부족한가? 3번은 정말 3번이었을까? 100번은 정말 100번이었을까?
"순수한 지속은 자아를 그 자체로 그냥 살아가게 내버려 두고, 이전 상태에서 현재 상태를 분리하지 않을 때, 우리의 의식 상태들이 존재하기 위해 취하는 형식이다." 앙리 베르그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대한 시론>
철학자 베르그손은 '시간'을 '공간화 된 시간'과 '지속의 시간'으로 구분한다. '공간화 된 시간'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간 개념이다. 1년은 365일, 하루는 24 시간, 1시간은 60분, 1분은 60초와 같이 정량적으로 측정 가능한 시간처럼 말이다. 시간이 공간화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시간 개념을 공간에 기초하여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는 원형 시계를 관찰해보면 알 수 있다. 1부터 12까지의 숫자가 원의 바깥쪽에 30도씩의 간격으로 분포되어 있다. 시계 속 원판의 공간이 균일하게 나눠져 있는 것이다. 분침과 초침이 이 공간속에서 움직이고 우리는 그 분침과 초침이 만들어 내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 시간을 가늠한다. 이처럼 '공간화 된 시간'은 '수학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갖는다.
반면, '지속의 시간'은 이와 다르다.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 각각 똑같이 1시간 동안 운동을 했다고 해보자. 이 두 사람에게 '1시간'이라는 시간은 같게 느껴졌을까?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1시간은 힘들고 짜증나고 지루한 '1시간' 이었을 것이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즐겁고 활력 넘치고 쏜살같이 지나간 '1시간' 이었을 것이다. 또, 아무리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운동을 했다면 그 1시간은 힘들지만 유쾌한, 그래서 빠르게 지나갔던 '1시간' 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지속의 시간'은 '체험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다질성'을 갖는다.
이처럼 '공간화 된 시간'과 '지속의 시간'은 엄연히 다른 시간 개념이다. 어떤 것이 삶의 진실에 더욱 가까울까? '지속의 시간'이다. 누구나 같은 시간이라도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 느껴졌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잠시 멈추고 하나의 기억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은 '지속의 시간' 속이지 '공간화 된 시간' 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지속의 시간도 모두 같은 지속이 아니다. '슬픔의 지속'이 있고 '기쁨의 지속'이 있다. '슬픔의 지속'은 트라우마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다. 과거에 상처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다가 그 기억에 빠져서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었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기쁨의 지속'은 대표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할 때를 예로 들 수 있다. 혹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를 예로 들 수 있다. 그 때 우리는 나를 잊고 시간을 잊는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에서의 3번의 시간들은 '슬픔의 지속' 이었고, <낯설고 먼>의 100번의 시간들은 '기쁨의 지속' 이었다. 3번은 공간화된 시간이 무한히 늘여져서 지속의 시간 속에 갇힌 것이고, 100은 지속의 시간을 무한히 압축해서 공간화된 시간(100이라는 숫자)으로 꺼낸 것이다. 3은 수동적이고 100은 능동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작가가 혹은 감독이 어떤 것을 창조하고자 할 때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작품을 압도했는지 압도되었는지는 그 작품의 피부가 벗겨지고 그 곳에 그저 드러나는 것이다.
"우주는 지속한다. 우리가 시간의 본성을 심화시켜 볼수록 더욱 더 우리는 지속이 발명과 형태의 창조,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에 따르면 '지속'은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유기체든 아니든간에 모두 '지속'을 통해 질적인 변화, 즉 '창조적 진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속의 근간에는 '욕망' 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욕망하는 것을 할 때에만 시간을 잊고 나를 잊는다. 욕망하는 것을 잘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다른 나로 변해간다. 인간의 지속은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해자의 아픔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무리 미궁같은 뫼비우스의 띠라고 해도 닫힌 미궁이 아니라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드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원래는 안쪽면은 안쪽면으로만 이어지고 바깥쪽면은 바깥쪽 면으로만 이어지는 링의 한쪽을 자른 뒤 잘린 양쪽 끄트머리 중 한 쪽을 앞면과 뒷면을 뒤집어서 붙힌다.
그 이음새. 그곳이 안이 밖이 되기도 하고 밖이 안이 되기도 하는 응축의 시작점이다. 그 이음새 때문에 과거에 내가 했던 행동이 마치 업보처럼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는 영원히 반복된다. 그런데 똑같은 이음새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벌어질수도 있다. 링을 자른 뒤 뒤집어서 이어 붙히는 '행동'을 통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현재를 이어붙힐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지각의 현재성(actualité)은 그 활동성(activité)에서, 지각을 따르는 운동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그것의 더 큰 강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는 관념에 불과하며, 현재는 관념-운동적(idéo-moteur)이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22 p.
"그러나 이제부터 지각과 기억 사이의 모든 차이는 붕괴되어 버린다. 과거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ce qui n'agit plus)이며 과거의 그런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현재, 즉 작용하는 것(l’agissant)과 실제로 구별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23 p.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작은 행동 하나라도 하게 된다면 현재는 더 나은 삶으로 변한다. 미래는 변한다. 과거도 변한다. 그렇게 기억도 변한다. 과거는 관념에 불과하며 현재는 관념-운동적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과거라는 관념을 품은 현재의 운동 (행동)인 것이다. 과거는 본질적으로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임과 동시에 작용하는 현재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뫼비우스의 띠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불행의 미궁일수도, 행복의 자동운항장치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물질과 기억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두 가지 실체이지만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에서 섞여들어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앞서 뫼비우스의 띠에서 마치 명확한 이음새가 있는 것처럼 적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어디가 과거와 현재가 뒤집히는 곳인지 알 수 없다. 모호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서 있는 지금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를 불행의 미궁으로 만들지 행복의 자동운항장치로 만들지는 지금 여기 서 있는 내 몸에 달려있다.
"미래에 대한 영향을 미치려면 과거에 대한 동일한 양의 일치하는 조망(perspective)이 있어야 된다."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118 p.
나는 과거 기억을 죄다 슬픔으로 편집해 놓은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현재도 미래도 슬프게 지각했다. 슬픔 속에 사는 사람은 약하다. 약한 사람은 선하지 않다. 무지한 사람은 선하지 않다. 약한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히곤 한다. 내가 준 상처와 내가 저지른 잘못은 반드시 나의 업보처럼 나에게 되돌아온다. 영원회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미궁의 사슬, 지금 이 곳에서 슬픔의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기뻐지기 위한 걸음을 한 발자국씩 꾹꾹 눌러 쌓아야 한다. 과거가 무겁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베르그손이 말해준다. 미래에 대한 영향을 미치려면 과거에 대한 동일한 양의 일치하는 조망이 있어야 한다고. 현재 내가 꾹꾹 눌러 쌓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 뒤의 여백을 채워 과거가 된다. 그렇게 눌러담은 과거가 이전의 나의 슬픔과 과오의 과거를 충분히 짊어지고 났을 때에서야 나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와 <낯설고 먼>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졌는지 알겠다. 3의 지속은 과거지향적이고 100은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두 작품의 주인공, 세호와 카터는 모두 과거-현재-미래의 이음새에 서 있다. 그러나 세호의 현재는 과거에게 침범 당해 있다. 그래서 자꾸 뒤를 돌아보고 뒷걸음질 친다. 그러나 카터의 현재는 과거를 침범하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만 한 번 뒤를 돌아볼 때마다다 그 동일한 양만큼의 한 걸음씩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세호의 뫼비우스의 띠는 딱딱하게 굳은 석상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러나 카터의 뫼비우스의 띠는 알 수 없고 신비스러운 빛과 형태를 띄는 그 무언가로 변해갈 것이다. 세호와 카터는 각자의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영원회귀할 것이다.
"만약 내가 설탕물 한 컵을 만들려고 한다면 서둘러도 소용이 없고,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작은 사실이 알려주는 바는 상당하다. 왜냐하면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전체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나의 조바심, 즉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수도 없는 나의 고유한 지속의 몫과 일치한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앙리 베르그손, <창조적 진화>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낯설고 먼>은 2020년 발생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가 끝난 뒤 나오는 엔딩 크레딧에 무고하게 죽어간 흑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얼마나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걸까?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 인해 고생한 친구와 아버지의 가정 폭력 때문에 상처받은 친구들을 알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선택하지도 않은 부모로 인해 고통 받아야 하는걸까? 혹은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의 폭력에 의해 고통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나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떤 때에 나는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가해자였던 적도 있으니까. 어떤 때에는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더라도 암묵적 동의나 외면을 통해 간접적인 가해자였던 적도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세호의 분노는 3번이 아니라 100번 300번 3000번 아버지를 죽여야만 조금이라도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나였어도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세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카터는 백인 경찰의 아픔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가해자가 왜 가해자가 되었는지를 알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경찰은 그를 이해해주려 했던 카터를 죽인다. 그리고 101번째 기회의 날 눈을 뜬 카터는 이야기 한다. "그는 나를 그냥 죽이고 싶을 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으로 가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101번'이라는,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수도 없는 고유의 지속의 몫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딘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겠다. 그가 언젠가는,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반드시 집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 보고자 애를 썼다.
그는 강아지를 사랑했댜.
그리고 사랑하는 강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카터가 집에 도착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집’에 도착하는 모습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