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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피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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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Mar 13. 2024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피해의식」후기: 프롤로그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아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이성복,「그 날」


작년 이맘때쯤이었을까요. 아득한 그 곳에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당신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읽어볼래? 라고 선선히 건네주는 네모난 화면을 엉거주춤 받아 들었지요. 마음에 굳은살이 베기도록 글을 썼을 당신이었겠지만 당신은 어쩐지 저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런 눈치였습니다. 저의 시선은 시린 빛이 번져 나오는 직사각형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당신의 실루엣에 붙들려 있어 순식간에 혼곤해졌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러운 눈길로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소중한 글인 것을 알기에 함부로 읽을 수 없어, 걸음을 재며 걷느라 자꾸만 호흡을 고르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숨을 죽이며 저에게 무언의 독려를 보내는것만 같았습니다. 네모난 화면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습니다. 어딘지 달뜬 얼굴, 그 안에 담긴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알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당신 스스로를 싫어했는지. 그리고 옛날의 당신 같은 저를 보고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그 날 오 분도 안 되었던 그 순간은 저에게 영원히 푸르고 시리게 기억될 겁니다.


저는 저를 무던히도 싫어했습니다. 제가 싫었습니다. 진심을 다해 잘하고 싶은 일이 없는 제가 싫었습니다. 폭우가 내리는 세상에 뛰어들어 씩씩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유약한 제가 싫었습니다. 누군가 강제하지 않으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지는 제가 싫었습니다. 강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면서 저에게 소중하거나 약한 사람들은 함부로 대하는 제가 싫었습니다.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한 제가 싫었습니다. 예쁘지 않고 몸매가 좋지 않은 제가 싫었습니다.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은 제가 싫었습니다. 저보다 똑똑하거나 예쁘거나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불같은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는 제가 싫었습니다. 내가 나아지려는 노력보다는 그들을 상처 주고 끌어내리려 했던 제가 싫었습니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저만 생각하는 제가 싫었습니다.


저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들었기에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더더욱 병들어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구실을 마련하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병든 존재들에게서 저의 존재의 의미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들의 구멍난 마음을 메꿔주고 싶었던 걸까요. 사실은 그 까만 구덩이들을 삼키고 파괴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저에게 사심 없이 친절히 곁을 내 주었던 이들에게 저는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던 걸까요.


우물에 독을 푼 사람에게도 깊은 상처가 생긴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전까지 저는 누군가를 힘껏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아버렸습니다. 긴 시간 도망쳐 왔습니다. 몸을 다그쳐서 마음을 갈아 없앴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마음에 새살이 돋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눈빛이 떠오릅니다.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는, 그러나 흰 그림자가 져 선선하게 윤이 나는 눈빛. 얼마나 많은 슬픔을 품고 삭이고 반질거리게 닦으면 그런 눈빛이 될까요. 그런 눈 앞에 저는 어떤 마음으로 서야만 할까요.


이제 저에게는 몇몇의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도 저처럼 병들었습니다. 그들의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이제는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눠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시덥지 않은 농담을 툭툭 던지고, 함께 땀 흘리며 운동하고, 때론 새로운 장소에 설레는 여행을 가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싶습니다. 심각해지지 않고 유쾌하고 진지해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병을 함께 아파하고 끝내는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씩씩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말했지요. 저의 상처 받은 마음을 잘 치유했으면 좋겠다고요. 지독히도 저만 알았던 저는 지금까지도 몰랐습니다. 당신의 책 제일 앞 장에 적혀 있는 이성복 시인의 글귀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을. 지금 이 순간 얼굴이 떠오르는 모든 이들의 아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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