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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피해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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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보경 Mar 13. 2024

아빠와 점

「피해의식」후기: 01.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무엇인가? 피해의식은 피해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이것이 피해의식의 적확한 정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도한'이다. 피해의식은 기본적으로 자기보호 장치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과도'하다. 「피해의식」 황진규, 31 p.
피해의식은 피해받았기 때문에 생긴 의식 구조이기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이기에, 그 영향은 매우 나쁘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불행한 삶으로 내몰기 때문이다.「피해의식」 황진규, 33 p.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보통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하지 않는 아빠였기에 의아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에는 절제된 반가움 같은 것이 뭍어 있었다. 마음 한켠이 아리고 미안하면서도 껄끄러움을 느끼며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주 토요일에 몇시에 오냐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큰어머니의 환갑잔치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 날 엄마가 해외 여행을 가 계시는 바람에 내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다며, 엄마는 두어달 전부터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덤으로 올해가 날삼재이니, 손톱 발톱과 머리카락 한 올씩 꼭 모아서 화장대에 두고 가라는 말을 신신당부의 당부를 더하면서. 달력 앱을 켜니 그 주 주말 토요일에 큰어머니의 환갑잔치 날이라고 적어둔 것이 보인다.


"최대한 빨리 갈게"

"빨리가 몇 신데? 아빠 그 날 시험 있어서 너가 일찍 와서 강아지 좀 봐줘야 하는데. 아홉시 쯤 와"

"노력해볼게"

"아무튼 토달지 말고 오라면 일찍 와"

"..."

"...아빠가 얼마 전에 깜짝 놀랄만한거 봤다"

"뭔데?"

"너 찔리는 거 있지?"

"아니, 없는데. 뭔데 그래"

"하여튼 그런게 있는데 아빠 깜짝 놀랐다"

"뭔데? 얘기를 해야 알지"

"전화로 할 순 없고 그날 오면 나랑 둘이 얘기해"

"아, 뭘 둘이 얘기를 해. 그냥 전화로 말해주면 되지"

"거봐 너 뭐 찔리는거 있지 아빠 다 알아"

"됐다. 그냥 그 날 가서 얘기해. 끊어"

"늦지말고 꼭 일찍와. 엄마가 말한 손톱발톱이랑 머리카락 꼭 가져오고. 니 엄마가 너 지갑이랑 차에 넣어두라고 부적 줬으니까 그거도 잊지 말고 꼭 가져가고"


찝찝한 마음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직감적으로 아빠가 내 브런치 글을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쾌하고 불안한 마음에 휩싸였다. 동시에 씁쓸했다. 그런 감정이 드는 이유는 내가 아직 부모님으로부터 정서적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앞에 두면 으레 늦장을 부리던 나는 그 날도 어김없이 늦장을 부리다 늦은 출발을 했다. 그 날 따라 내부순환로는 꽉꽉 막혔다. 스피커폰으로 들려오는 짜증과 화가 섞인 아빠의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4차로나 되는 고가도로에 멈춰선 차들이 느릿느릿 기어갔다. 나는 앞차 뒷유리창을 쏘아보며 손가락을 핸들 위에서 산만하게 튕기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가 글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뭐라고 해야할까. 여태까지 나의 삶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글을 읽고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왜 아빠가 내 글을 읽는게 두렵고 불안할까. 나는 왜 부모님의 과한 관심과 보호가 여전히 불편할까.


뚜렷한 마음의 가닥이 서지 않은 채 어느새 차는 동부간선도로로 빠지는 나들목에 접어들었다. 간선도로 하행선에서 나들목 하나를 두고 상행선으로 유턴하는 다리를 건너면 몇백미터 지나지 않아 석계역과 태릉입구로 빠지는 진출로가 있다. 역명이 쓰여 있는 빛바랜 초록색 간판이 너무나 친숙하다. 익숙한 사거리를 지나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빠져나가다 보면 길게 가지뻗은 아파트 진입로에 다다른다. 입구 차단기가 올라가 있다. 요새는 아파트 입구에서 외부 차량 통제를 하지 않나보다. 아니면 경비 아저씨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지. 칠이 벗겨진 직사각형 황토빛 타일로 외벽처리가 된 경비실 창문을 슬쩍 넘겨다 본다. 반쯤 열린 철제 창문 틈으로 그늘에 잠긴 내부가 보인다.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귀에 거슬리는 사이렌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고막을 성가시게 긁어대는 것을 외면하려 애쓰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이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은 늘 붐빈다. 겨우 한 자리를 찾아내 차를 구겨 넣는다. 먼지낀 옆 차에 코트가 닿지 않게 애쓰며 운전석 문을 닫고 게걸음으로 나온다. 106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룸 입구를 찾는다. 다른곳은 익숙한데 이 입구를 찾는건 항상 조금씩 헤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심호흡을 한 뒤 14층을 누른다.


강아지는 겅중겅중 뛰며 나를 반긴다. 아빠랑 동생은 이미 외출복 차림이다. 강아지가 반길 틈을 줄 새도 없이 우리는 집을 나섰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한정식 식당에 도달한다. 짧은 거리를 함께 걷는 동안 어색하지만 어딘지 들뜬 반가움 같은 것이 뭍어나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큰어머니 환갑잔치동안 사진을 찍고 케이크에 초를 켜고 안부인사를 주고 받는다. 결혼을 해서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큰조카 애가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다.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잘 걷지도 못하신다. 아빠와 큰아빠가 할머니 식사를 챙긴다. 나와 동생이 할머니를 부축했다. 나에게 실리는 할머니의 체중과 체온이 느껴진다.


환갑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에 일찍 가봐야 한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벌컥 화를 냈다. 조금 더 있다가 가면 어디가 덧나니. 너는 왜 애가 맨날 그러냐. 흥분한 아빠의 새된 목소리에 더 다투고 싶지 않아 카페에 들렀다. 글 이야기를 금방 꺼낼 줄 알았더니 아빠는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너네 회사 매각될 거라며 그건 어떻게 됐니, 누가 산다니. 연봉은 올랐니. 청약통장에 저금은 잘 하고 있니. 이번에 청년행복주택 꼭 신청해봐라. 3월달쯤에 전원주택 완공하니까 와서 청소도 돕고 그래라. 너희 엄마 너 온다고 하면 그저 좋아서 난리다. 그러고보니 아빠랑 대화하는게 오랜만이다. 아빠와의 대화는 늘 껄끄러웠다. 우리는 사실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가 길어지면 우리 사이는 어김없이 삐걱거리곤 했다.


커피 한 잔을 다 비우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에 좀 있다가 가". 아빠는 아쉬운 눈치였다.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 아빠가 미간을 꾹 접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를 붙잡지는 않는다.

집에 잠깐 들른 뒤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서려는데 아빠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아빠가 덥썩 말을 꺼낸다.

"너 아빠한테 숨기는 거 있지? 아빤 다 알고 있다"

"브런치 글 봤겠지 뭐. 그거 숨기는거 아닌데. 그랬으면 내가 내 이름으로 썼겠어?"

"그거 말고도 다른것도 있지?"

"다른게 뭔데. 그거 말고 없는데?"

"너 예전에 점 본 적 있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서 아빠를 홱 돌아봤다.

엘리베이터가 웅 소리를 내며 하강하기 시작한다.

"뭔 소리야. 무슨 점?"

"얼마 전에 어떤 여자한테 전화와서 그집 따님이 몇년 전에 점을 봤다고 잘 지내냐고 연락이 왔다"

"..."

"딸 성격이 지랄맞고 고약하지 않냐고 해서 내가 그렇다고 했다"

예상도 못한 아빠의 말이 황당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겉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무슨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고 있어. 나 점 같은거 여태까지 살면서 본 적도 없고 그런거 얼마나 싫어하는데"

"거짓말 하지마. 너 점 봤어. 아빠가 다 알고 있어"

그 순간, 마음속에 불덩이 같은것이 휙 들어앉아 집채만한 불을 훅 놓아버린 것 같았다.

"뭔 개소리야!! 나 점 본 적 없다고. 아빠 보이스피싱 당한거 아니야? 왜 딸 말을 안믿고 이상한 점쟁이 말을 믿는데? 나 점 보는거 미신 같은거 진짜 싫어한다고 했잖아"

아빠한테 개소리라니 제발 그러지 마. 마음이 비참하게 외쳤지만 내 입술은 제멋대로 열려 지껄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닫자마자 씩씩거리며 쏜살같이 뛰어가 차문을 열고 시동을 켜고 브레이크를 내리고 엑셀을 밟았다.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간 차가 코너를 우악스럽게 돌 때 하마터면 기둥을 긁을 뻔 했다.


비좁은 골목길로 토해져 나와 달리는 동안 핸들을 뼈마디가 새하얘지도록 으스러지게 붙잡았다.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져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면서 내부순환로를 다시 달리는 동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반응을 나 스스로도 믿을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퓨즈가 끊기듯이 마음에 불이 당겨지던 그 순간과 비이성적으로 쿵쾅거리던 가슴과 통제 안될 정도로 쏟아지던 눈물이 내 것이 아닌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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