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피해의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보경 Mar 22. 2024

문고리 없는 방

「피해의식」후기: 01.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피해의식

피해의식은 근본적으로 여섯 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우울함이 그것이다. 피해의식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지만, 이는 모두 이 여섯 가지 얼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변주인 셈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 피해의식은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 이라는 여섯 가지 마음 상태에 의해 표현된다.「피해의식」36p. 황진규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피해의식을 진단하려 할 뿐, 자신의 피해의식은 너무 쉽게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을 외면해버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오랜 습관이니까. 자신의 모습들 중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바로 피해의식 속에 있다.「피해의식」38p. 황진규


전신에 한바탕 해일이 휩쓸고 간 것 같아 진이 쭉 빠졌다. 상기됐던 얼굴이 식으며 심장박동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별안간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며 뻑뻑해지는 눈꺼풀을 깜빡였다. 먼지가 두텁게 쌓인 불투명한 도로 방호벽 너머 키 낮은 낡은 건물들 사이로 봉숭아꽃물 빛이 스며오고 있었다. 네이베이션 전자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 새 네시 반이었다.


'집에 가서 아무 생각 안하고 잠이나 자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그 날은 돈화문 국악당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표가 다 매진되는 바람에 접수처에 전화 문의까지 해 나름대로 어렵게 얻은 표였다. 그에게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오랜만에 보는 즉흥 공연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예매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피로는 잠시 미뤄두자. 내일은 일요일이니 내일 충분히 쉬면 될거야.

느린 템포의 단조곡에서 신나는 곡으로 유튜브 뮤직 알고리즘을 바꿔 틀었다. 좋아하는 락밴드 곡들을 들으며 흥얼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기도 한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

방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성가신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애를 쓴다. 그러나 쉽지 않다. 마치 마음 한 귀퉁이에 닻과 갈고리를 박고서 긴 로프 끄트머리에 매달린 채 유영하는 나의 뒤를 따라오는 것만 같다. 물에 잠긴 조각들이 마치 낚시 찌처럼 물의 표면 아래 위로 까딱거린다. 방향을 전환하면 그것들 역시 한두박자 늦게 불규칙한 리듬으로 흔들거리고 고개를 젓는다. 나는 수시로 곁눈질하여 그것들을 살핀다.

다행히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 신도림에 닿았다. 으슬하고 어두워지면 움직이기 꺼려질 수 있다. 왠만하면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하고 싶었다. 그는 1층 입구의 층계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랑 만남은 잘 했나?"

"아니. 아빠 말에 발끈해서 모진 말만 하고 왔어"

"무슨 일이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하다보니 다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에게 들려 주었던 몇 편의 어릴 적 레퍼토리들을 반복하여 풀어놓는다. 그는 "음" "그렇군" 과 같은 짧은 추임새를,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있었던 짧은 해프닝을 들려주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잠시 대화가 끊긴다. 그와의 침묵은 불편하지 않아서 좋다. 대화의 끝과 시작이 선명하지 않다. 태양이 하늘에 번지고 수그러들 듯 어느샌가 대화가 피고 지는 것 같다. 느리고 고른 숨을 쉬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부모님 집이 불편할까. 왜 아빠에게 화를 냈을까.




어린시절부터 집은 나에게 행복한 공간이 아니었다. 건설업계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긴 시간 근무했던 아빠의 생활력과 살뜰하지는 못해도 사치를 즐기지 않았던 소박한 엄마 덕분에 나에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어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아주 어릴적,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그래도 아빠의 근무지에 따라 다소 저렴한 동네들에 이사를 꽤 자주 다녔으니 주공 아파트의 허름한 느낌 그리고 울산공단의 음울한 느낌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때의 기억조차 나에게 가난했던 시절로 기억되지는 않았다. 없는 형편이었어도 부모님의 따스함과 사랑이 가득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나의 우울한 시기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반 동급생 여자애들 무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초등생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 학급 내에서 힘 있는 아이들이 따돌리기 시작한 표적은 삽시간에 모두의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육체적인 폭력이 가해지거나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후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나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교우관계였다. 어떤 때에는 종종 어느 무리에 속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겉돌았다. 지금은 덤덤히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처음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의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집에와서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엄마는 약하고 대체로 무기력했고 아빠는 차갑고 거칠었다. 부모님과 어떤 일에 대해서 의논한다는 것은 있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친 하교길, 낡은 연립 주택들이 늘어선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낙타 혹 같은 고개를 두 번 타고 넘으면 보이던 아파트의 외형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점도가 매우 높은 액체가 잔뜩 발라져 있는 단단하고 얇은 쇠 그물망이 에워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의 거듭된 회상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집에 대한 이미지가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마음 속에는 거대한 볼록렌즈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볼록렌즈를 통해 유년시절에 초점을 맞추면 볕이 가장 들지 않는 어두운 곳들에만 회상의 빛이 드리워졌다. 따뜻하고 유순한 배경들에는 모두 암막커튼을 내리듯 스위치가 내려졌다. 그 캄캄한 구석에는 여자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동산처럼 구부정하게 굽은 어깨, 짧달막하고 두툼한 코끼리 같은 다리, 지문 자국이 희미하게 비치는 촌스러운 안경을 쓰고, 유행과는 거리가 먼 - 엄마가 홈플러스에서 사다준 것 같은 - 옷을 입은 아이. 사람들 눈치를 살피느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 머뭇대며 움찔거리는 인중과 입술. 손과 발과 몸통이 분리되어 움직이는 것 같은 어설프고 모자란 몸짓.


집은 자유롭지 않았다.

대신 천진하게 끈적거렸으며 때론 냉엄하게 미적지근했다.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볕이 잘 들던 내 방에는

문고리가 없었다.


열네댓살쯤 부모님은 방문의 문고리를 풀어 압수해 버렸다. 혼자가 되고 싶으면 문을 곧잘 잠그곤 하던 때였다. 문고리 없는 방은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나의 마음을 낱낱이 해부하고 침범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막다른 곳에서 다리가 짓무른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문고리 없는 방문을 열면 찐득하고 습기가 가득한 물컹한 액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 맹장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날 밤 병동에서 복통과 마취약의 기운에 뒤섞여 신음할 때 나는 문득 무서운 기시감을 느꼈었다. 그건 바로 무시무시한 태양이 나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엄청난 태양 에너지가 나에게 쏟아져 들어올 때,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그 태양은 나를 고통속에 놓아둔 채 마취시켰다. 나는 내 방에서 쏟아지는 태양을 맞으며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나날들을 보내며 세상을 증오했다. 마침내 세상을 증오할 힘마저 바닥나 나를 증오하고 혐오했다.



피해의식의 여섯가지 얼굴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은 자신의 피해의식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뜻하지 않는 곳"에서 그 얼굴들이 드러난다면, 자신이 지금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 얼굴들이 "특정한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면, 바로 그 영역이 자신의 "피해의식의 서식처"라는 사실 역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이 "얼마나 자주", "오래 반복"되었는지를 통해 자신의 "피해의식의 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피해의식」38 p. 황진규


부모님은 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떨 때 기쁘고 슬픈지. 어떤 사람인지. 부모님은 반복해서 말했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야. 아무도 믿어서는 안 돼. 절대 손해보며 살지 마.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죄야. 방패가 되어줄 줄 알았던 말들은 안타깝게도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양한 암호로 나에게 전달된 신호들은 나의 신체와 마음을 꼼꼼히 잠궜다. 사랑은 끈끈한 마취제가 되어 입과 코와 귀를 막았다. 폐호흡을 하는 폐어처럼 나는 풍화되고 삭아갔다.


부모님은 내가 외교관이나 이공계 교수가 되길 바랐다.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으레 사회적 지위와 제법 풍족한 벌이를 보장받기 때문이었으리라. 어린시절부터 나에게 주입된 부모님의 욕망은 나를 책상에 붙잡아두었다. 그러나 나는 학업에 매진할수가 없었다. 특히 수학과 과학과 논리와 숫자와는 숫제 어울리기 어려운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수학과 과학이 꽤나 막대한 비중을 차지했기에 나름대로 그 세계에 발을 들이기 위한 노력을 들여 보아도 그곳에서는 늘 이방인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그 세계에 들어가면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모든 것이 부옇게 보였다. 나는 늘 명석하지 못한 나를 책망하고 자책했다. 이런 종류의 자기인식은 나를 오랜시간 동안 열등감과 두려움 그리고 무기력에 시달리게 했다.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공계 교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글의 세상에서 나는 안락함을 찾았다. 그 곳은 끈적하지도 미적지근하지도 않았다. 글은 채근하지 않았다. 더듬대는 나를 답답해하지도 손과 발이 뒤엉킨 나를 우스워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세계의 싸늘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면 나는 문학책 속에 담겨 있는 몇모금씩의 글들을 입술과 혀와 목구멍에 축이곤 했다. 그러면 갈라지고 피가 나던 마음이 유들해졌다. 비이성과 마법과 울렁임으로 가득찬 세계. 그런 세계에 다녀온 날이면 숫자와 논리의 질서정연함이 더더욱 견디기 어려워지곤 했다.

사실, 나는 말을 하는데에 더딘 사람이었다. 입을 열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언어를 빚어서 뱉는다는 행위 자체가 나에겐 고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말을 더듬거리게 되자 눈도 더듬거려 사람과 눈을 맞추는것에 많은 노력이 필요해졌다. 걷는 행위와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세세한 수십겹의 껍질로 나뉘어져 분리된 채 제멋대로 엉겨붙었다가 풀어졌다가 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많은 껍질들을 도무지 어떻게 꿰어야 할지 알 수 없어 공포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 글은 나를 수십개의 껍질로 분리되지 않도록 붙들어매주는 역할을 했다. 말을 할 수 없을 때면 글을 썼다. 나만의 좁은 세계였지만, 그곳에서 나는 끊임없이 울렁이는 물의 막 같은 것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았다. 굴절된 세상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어느새 차는 돈화문 국악당에 닿았다.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국악당 왼쪽편에 주황빛 가로등이 듬성듬성 밝혀져 있는 골목이 눈에 띄어 차를 돌렸다. 날이 저문지 얼마 되지 않아 골목길에는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넓지 않은 일방통행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술집과 카페들이 저녁 장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것이 느껴졌다. 대다수의 가게들이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는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꾸며져 특유의 분위기와 안정감을 풍기고 있었다. 오가는 손님은 많지 않았지만 호기심 있는 젊은 커플 몇 쌍이 가게 유리창 내부를 들여다보며 어둑해지기 시작한 골목길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우리는 불이 꺼진 이탈리아 레스토랑집 왼편의 작은 공터에 주차를 한 뒤 돈화문 국악당으로 향했다.


국악당 내부로 들어서면 50여평 남짓되는 잔디밭이 가운데에 펼쳐져 있다. 사면을 둘러싸고 있는 한옥 집채와 짧다른 푸르스름함이 어우러진 전경에서 익숙한 차분함과 어딘지 모를 산뜻함이나 새초롬함을 느낀다. 오른편으로 두 사람 정도 함께 걸을 수 있을 정도 폭의 석조 도로가 나 있다.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이끌며 얼굴을 힐끔 살폈다. 입가의 팽팽함이 얕은 긴장을 드러내 주었지만 설핏 흥미로워하는 것도 같았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한옥 건물 내부로 들어선다. 티켓을 끊은 후 공연장을 안내받는다. 공연이 이미 시작된터라 우리는 다음 세션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공연장 맨 앞자리로 자리를 안내 받는다. 객석은 넓지 않았지만 거의 만석이었다. 다음 연주자들이 악기를 세팅하느라 무대 위는 잠시 소란스럽다. 무대 조명이 꺼지며 어둠이 내려 앉는다. 관객석에 미풍처럼 감돌던 대화소리들도 침묵이 빨아들이듯 사그라든다.


조명이 서서히 빛을 불러들인다. 무대 가운데 의자에 앉은 젊은 여자 소리꾼이 허공을 응시하며 새인지 동물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울린다. 마치 그녀가 여지껏 흡수해 온 외부의 모든 것들이 그녀 속에서 저며지고 버무려지고 끓여져서, 그녀의 몸으로부터 그 어떠한 저항도 없이 관통하여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것만 같다. 그녀의 성대, 얼굴 근육, 피부, 그리고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느낀다. 기타와 거문고 그리고 장구가 소리를 얹는다. 나는 이따금 눈을 감고 느린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무대에서 쏟아지는 장기의 비명들을 들으며 나는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원초적인 꿈틀거림을 느낀다.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억울함, 우울함.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이다. 이 여섯 가지 얼굴은 두 가지 층위로 나뉜다. 피해의식의 정의부터 다시 살펴보자.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다. 이 자기방어를 기준으로, 여섯가지 얼굴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자기방어를 위한 '도구'와 자기방어로 인한 '결과다.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은 자기방어의 '도구'이고, '억울함·우울함'은 자기방어의 '결과'다. 「피해의식」40 p. 황진규


초등학교 2 학년 때 처음 장구라는 악기를 접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한다. 얇다란 대나무채와 공이가 달린 궁채로 허리가 잘록한 몸통 양쪽을 감싼 가죽피를 내려칠 때, 손등을 타고 손목과 심장으로 전해지던 떨림과 경쾌한 소리를 나는 무척이나 애정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타악기에 매료되었다.

어느 날 하교시간이었을 것이다. 지루한 수학 선생이 칠판에 흰색 노란색 파란색 분홍색 백목으로 질서있게 새겨놓은 지렁이같은 숫자들을 분을 골고루 뒤집어 쓴 헝겊 지우개로 지우고 있을 때였다. 곰팡이 핀 듯 눅눅한 교실의 공기를 뚫고 화살같이 쨍한 꽹가리 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가 저절로 휙 돌아갔다. 애타게 슬쩍 열려 있는 창문 틈으로 모래바람이 날리는 운동장 위에 샛노란색, 새빨간 색, 푸른색이 수놓인 농악 치복을 입은 아이들이 둥글게 떠들석한 물결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익숙하게 가슴을 움켜쥐는 장구 소리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가느랗고 애절한 도랑을 내는 태평소 소리, 일정한 간격으로 묵직한 말뚝을 박는 북 소리, 그리고 하늘을 두동강 낼 것만 같던 징 소리가 울렁였다.


나도 저걸 하고 싶다.

그 순간 성근 불티조각이 튀어올라

목구멍의 천장이 화끈거렸다.


이상하게도 국악은 내 마음을 울렸다. 구슬프고 구성진 가락과 불규칙한 마디로 꺾이는 소리꾼의 목소리는 어린시절 어느날 보았던 갈대밭의 광풍같은 물결을 연상시켰다. 해금과 가야금 거문고를 타는 연주자들을 보면 외줄을 타는 곡예사가 떠올랐다. 자신의 몸을 던져 소리를 만들어 내는 그들을 보면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리고 들썩였다.


엄마는 풍물패에 들고 싶다는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유는 공부였다. 방과후활동 신청서에 풍물패를 적어서 내는 친구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방과후 풍물패 수업이 있는 날이면 나는 일부러 복도끝에 위치한 음악실쪽 층계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그 소리들을 거부하기란 어려웠다. 육중한 음악실 쇠문을 뚫고 새어나오는 연주음들을 들으며, 목구멍에 생긴 화상자국의 쓰라림을 느꼈다.


그 모든 것들을 외면하고 학업에 몰두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두툼한 책과 빽빽한 판서와 지루한 선생의 목소리를 빤히 들여다보며 의미있는 가르침을 하나라도 캐 내려 애쓰는 50분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어 낸 뒤 찾아오는 쉬는시간을, 나는 사실 몇곱절은 더 두려워 했다. 10분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동급생 무리에 섞여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늘 겉돌았다. 그들의 단단하고 매끈한 표면을 애타게 표류하는 나는 그들에게 없어도 될 존재였다. 아니 사실은 없는 것이 더 편한 존재였다.

나는 어디를 가든 눈치를 보는 소심하고 찌질한 아이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늘 주인공이 되는 존재를 보면 위축되었다. 관계를 맺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으며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솟았다.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감정들을 빨아들이고 연소시키는 허무만이 남았다. 사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기력과 싸워왔다. 무기력에 번번히 속수무책으로 지기도 했지만,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했다. 그러나 팔다리를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더 큰 무기력을 맞딱드리곤 했다. 내 안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갔다. 지독한 우울과 억울함 속으로 좀먹으면서.


그렇게 세상의 모든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무언의 음계의 세상에서 헤메었다. 음악을 좋아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음악을 사랑했다기보다 도피처 삼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당시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절실한 구원자였다.

해가 지나며 나의 관심사는 락음악으로 옮겨갔고 그 중에서도 드럼의 사운드는 나의 마음을 불가항력으로 사로잡았다. 묵묵히 밀어내는 듯한 베이스 드럼과 거셈과 약함 사이에서 재치있게 갈피를 잡으며 당기는 스네어 드럼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심실과 심방 내부에서 세차게 돌고 있는 붉은 피가 떠올랐다. 어느 곡을 듣던 드럼의 사운드만이 뜨겁게 도드라졌다. 마치 점자책을 눈을 감고 더듬으면 손끝에 느껴지는 쌀알같은 점들의 무늬처럼, 눈을 감고 음악을 더듬어 들으면 드럼의 모음과 자음들이 느껴졌다. 드럼을 연주해 본적이 없는데도 생생히 만져질 것 같은 꿈틀거림이 심장으로부터 손끝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시절까지 드럼을 배워보려는 노력을 몇 번 시도했지만 번번히 좌절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가장 용감한 일은 바로 대학 중앙동아리 밴드의 오디션을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간들은 바싹 말라서 갈라진 마음에 단비가 적셔주는 것 같았다. 매일을 동아리 부실에 눌러 살며 질리도록 음악을 듣고 드럼을 연주하고 무엇엔가 받쳐서 합주를 했다. 나의 대학시절의 낭만은, 지하 동아리 부실의 담배냄새 잔뜩 배인 낡은 방음 스펀지에 흠뻑 스며 있었다. 졸업 이후 몇년까지도 끈적이는 땀에 밴 스틱을 쥐는 시간들에 매달렸다. 아마, 그 시절 음악과 드럼은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구명줄이었을 것이다.




피해의식은 얼굴에 새겨지는 깊은 주름과 같다. 어두운 여섯가지 표정들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이 동시적으로 뒤엉킨 얼굴이 있다. 이 얼굴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욱 어두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다. 여섯 가지 어두운 표정들이 지속되면서 더욱 어두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는 깊은 주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각인된 주름이 좀처럼 펴지지 않는 것처럼, 피해의식 역시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피해의식」59p. 황진규


"어땠어?"

공연장을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

"글쎄... 이런 종류의 음악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 졸아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집중해서 보게 되더라"

지루해 하지만은 않으리라 짐작했지만 그의 긍정적인 대답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국악 좋아했어. 드럼 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한 숨을 고르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예전이었으면 저들을 보고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했을거야. 그러곤 체념하고 무기력해졌겠지. 한 술 더 떠서 우울하고 억울한 삶이라고 누군지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원망을 쏟아냈겠지. 나는 겁이 나서 하고 싶은것을 하며 살지 못하고 있는데 저들은 용감하게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더라면 지금 더 행복했을지 물어왔다. 나는 그렇지 않았을거라고 대답한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깨우치게 되었으니. 그러나 나는 나에게 퍽 어울리지 않는 세계에서 너무 오래 헤메였다. 긴 시간 어지러이 주저 앉아 있었다.  


하루종일 붙잡고 씨름해도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는 효율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복잡한 돈과 마진과 환율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뽑아내기 위한 통계처리

모든 가치를 돈과 숫자로 환산하는 비열하고 소름끼치는 논리의 조각들


세포와 조직이 엉키고 뭉쳐 심장과 내장과 피와 뼈 피부와 털들이 꽁꽁 압축된 생명체들의 펄떡이는 박동이,

그 모든 것들이 말도 안되는, 이해할수도 없는, 용서할수도 없는, 그런 방식으로 무자비하고 허탈하게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광경을 언제까지 망연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걸까.


"나는 나에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

"너에게 자연스러운 삶이란게 뭘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아빠에게 화를 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문고리 없는 방은 나를 지켜주지 못했어.


가장 튼튼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의 가르침, 돈과 명예와 가족주의와 안전지향적인 삶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  점쟁이의 말, 부적, 삼재풀이는 그 자체로 불안으로 가득찬 삶에서 잠시 불안을 가시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그러나 그것들은 오히려 불안을 부추겼어. 마스크와 알코올 소독제, 외출통제, 병적인 건강검진과 영양제 섭취, 건강식에 대한 집착, 보험과 청약통장과 투자, 안정적인 모든 것들. 그런 것들에 나는 자꾸만 어긋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거야. 나를 할퀴고 내팽개치고 흠집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 거야.


나를 지키고 싶지 않았어.

그것이 사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


"예전에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통제하고 억압했다고 생각했어"

나는 단어를 신중히 고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침묵하며 내 다음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그들이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랬다는 걸. 그들도 세상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랬다는 걸. 그 두려운 세상에 사랑하는 존재를 내놓을 수 없어서 그랬다는 걸."


그 사실이 진실이라 더 잔인하고 아파.

마지막 말과 목구멍에 솟아오른 멍울을 혀뿌리 뒤로 삼키며 그의 손을 세게 쥐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와 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