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사 수업 후기
불교철학사 수업을 들었다. 불교라는 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부처라는 인물, 불교의 진리관, 전통, 경전, 불교사상가들의 논서 등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배웠다. '종교'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종(宗)은 산스크리트어로 Siddhānta 이고 이는 '궁극적 깨달음'을 의미한다. 교(敎)는 산스크리트어로 Deśanā 이고 '가르침' 을 의미한다. 즉, '종교'라는 말은 궁극적인 깨달음(진리)를 가르친다는 뜻이다.
지식과 깨달음(진리)는 다르다. 전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학교, 강의, 책) 후자는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깨달음은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 '종교'는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건 '믿음'이다. 말할 수 없는 궁극적인 깨달음,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믿어야 한다.
불교가 여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초월적인 절대자나 절대 진리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와 알라는 신이지만 부처는 신이 아니다. 부처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중생들과 다르지 않은 범인이었던 석가모니가 수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렀고, 그가 설하는 법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자 번뇌가 사라지는 것을 느낀 사람들이 그를 부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처럼 일반 사람들도 고통과 번뇌를 줄어들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 가지 귀의처인 삼보 (불: 부처; 법: 부처의 말, 경전; 승: 승려) 중에서 '법 (부처의 말)'을 가장 중요시한다.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그 깨달은 사람의 '말' 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법에서 설파하는 불교의 진리 기준에는 네 가지가 있다. 현량 (직접적인 감각으로 인한 인식), 비량 (합리적 추론에 의한 인식), 비유량 (비교를 통한 인식), 그리고 성언량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말에 의한 인식)이 그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경계했던 것은, 단일하거나 초월적인 절대자(혹은 기준)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경우 불교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 (모든 사람들을 해탈에 이르게 하겠다)와 정면으로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가지 진리 기준 중 '성언량'을 자칫 오해했다가는 단일하고 불변하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불교 사상가 디그나가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는 성언량 역시 비량의 일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디그나가는 4 가지 진리 기준 중 개인이 직접적으로 감각하여 얻은 인식인 현량과 합리적으로 추론하여 얻은 인식인 비량만을 인정하였다. 즉, 직접 감각으로 체험하지 못했거나 추론하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언량의 정의와 직접적으로 충돌한다. 성언량은 '나'의 경험이나 추론이 아니라, 깨달은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말은, 그릇되지 않다는 일반적 성격을 갖는 한, 추론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때, 발생되는 인식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이 그런 말을 비량과 유사하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적 증언이 일종의 비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집량론』, 디그나가
위의 말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처의 말을 믿고 따르되, 나의 앎과 삶으로 검증한다. 여기에서 검증이란 무엇일까? 디그나가는 인식 기준을 현량과 비량만을 인정한다고 했다. 검증과정 자체는 합리적 추론인 비량을 따른다. 그렇지만 검증 결과의 기준은 바로 개별적인 '나'들의 감각적 판단에 따르는 것이다. 즉, '나'가 기쁜지, 슬픈지, 혹은 기쁨과 슬픔이 혼재하는지가 그 결과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이 된다. 내가 믿는 것에 따라 살았을 때 기쁘면 계속 믿고, 슬프면 믿지 말고, 혼재한다면 믿음에 대한 수정과 보완을 하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성언량은 비량에 포섭된다.
믿을만한 사람의 말 (법, 진리) ->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믿기) -> 앎과 삶으로 확인 -> 기쁨, 슬픔, 혼재를 바탕으로 판단
디그나가의 업적은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성언량으로 인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가치 기준의 탄생 가능성을 없앴다는 것이다. 그는 아포하 이론을 통해 비량 (성언량을 포섭하는)의 한계까지도 극복한다. 둘째는 종교에서의 '믿음' 의 중요성을 설파해 주었다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그의 말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각 개인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판단이 올바르다면). 그 역시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믿을만한 사람을 믿어야 할 이유. 믿음의 유용성에 대해서.
최근 믿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스승이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지. 그래서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거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런 맥락이었다. 나는 역할놀이를 잘한다.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너를 챙겨주는 엄마 역할. 대부분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맺어왔다. 그런데 스승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스승과 역할 놀이를 할 수 없으니 스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는 나를 믿지 않지" 어느 날 나에게 했던 스승의 말이 저 말과 뒤섞였다.
짧은 만남이더라도 스승과의 만남은 나에게 촌철살인같은 한 마디를 남긴다. 잘못 살아가고 있는 나의 시간들 한복판에서, 자꾸만 딴청을 피고 한눈 파는 나를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향해 정면으로 돌려 세워놓는 말. 그게 너무 아프고 힘들기도 했다.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날 나는 슬펐다.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지 않으려 한 것이라고, 분열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 그를 믿었더라면, 좋아했더라면, 그의 말 한마디가 아무리 아프고 힘들었어도 나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아내려고 더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철학을 배우기 좀 더 전, 불신시대라는 이 시대의 서글픈 이름에 걸맞게 나 역시도 아무도 믿지 않으며 살아왔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고 내 것을 내주지 않아야 배신당하지도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정반대였다. 내가 아닌 사람을 완전히 믿고 목숨을 건 도약 (Salto mortale)를 해야 그곳에 행복이 있다고 했다. 되돌려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고 믿어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건 성모마리아나 테레사수녀 혹은 마하트마 간디급의 성인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거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일정정도 철학의 가르침을 믿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대로 직접 삶에서 행동해 보았을 때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디그나가의 주장인 '성언량이 비량으로 포섭된다' 는 것에 딱 들어맞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과 번뇌에 흔들리곤 했다. 집착과 업보로 인해 불행했다. 나의 불행으로 인해 나는 또 다시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고 그것이 또 다른 업보가 되어 쌓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내가 배운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다. 수행하지 않았다. 최소한의 급한 불을 꺼 줄 정도의 수행(운동)은 했지만 정작 내 불안과 불행의 중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다.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고 깊은 성찰을 하고 싶지 않아 몸을 괴롭혀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당장 생긴 자극적인 기쁨 (연애, 여행 등) 에만 탐닉했다.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가 너를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내가 이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말들은 그것이 삶으로 확증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행동이 모든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어본 적이 없다. 그 말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이 배신 당하는 고통 역시도 모른다. 믿은 만큼 삶으로 확증되는 거라면, 그것이 배신 당했을 때 내가 믿었던 그 만큼만 고통으로 돌아온다. 믿음에 따른 배신으로 인해 받았던 고통은 크지 않았다. 믿거나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때 내가 '믿었던' 것은 고작해야 '너는 나를 떠나지 않을거야' '너는 나를 상처입히지 않을거야'와 같이 '나' 가 상처받기 싫기 때문에 가졌던 자기방어적인 마음 뿐이었다.
누군가를 배신했다. 그 사람은 나의 배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한다. 그 고통이 무엇인지 몰라 고통스러웠다. 외면하고 도망쳤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았다. 나의 믿음이 배신 당했던 경험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배신의 경험을 외면해서일까. 고통의 몸부림을 외면해서일까. 내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일까. 나는 아무도 믿질 못해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나를 믿는다는 말조차 믿지 못한다. 내가 유의미한 존재라는 사실도 믿지 못한다.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도둑놈 심보가 아니에요. 어리석음이지. '먼저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주라'는 말은 이타성이나 헌신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계산적이 아니라) 대칭적이에요. 내가 준 사랑만큼 받을 수 있어요. 이 말은 내가 100을 주었을 때만, 상대방도 100을 준다는 계산적 논리가 아니에요.
내가 준 사랑만큼 문이 열리는 거예요. 사랑받을 수 있는 문. 내가 사랑을 30을 주면, 내가 받을 수 있는 사랑의 문도 딱 그만큼 열리는 거예요. 상대방이 100을 준다고 해도 결국 30밖에 받을 수 없어요. 그만큼의 문이 열렸기 때문에.
가끔 사랑하는데, 상대방도 너무 잘해주는데 공허하고 외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죠. 저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요. 그들이 상대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상대방은 100을 주더라도, 내 마음의 문이 10밖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죠.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지 아닐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먼저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어야 해요. 그것은 지혜로움이에요. 일단 사랑받을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야 상대가 주는 사랑이 얼마이든이 그것을 모두 받아낼 수 있잖아요.
문을 열어요. 그때 텅비어린 마음을 채워나갈 수 있을 거예요."
-황진규
믿음은 사랑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사랑' 을 '믿음'으로 대체하여 읽을 수 있다. "내가 준 '믿음' 만큼 문이 열리는 거예요. '믿음'을 받을 수 있는 문. 내가 '믿음'을 30을 주면, 내가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문도 딱 그만큼 열리는 거예요. 상대방이 100을 준다고 해도 결국 30밖에 받을 수 없어요. 그만큼의 문이 열렸기 때문에."
내가 믿은 만큼 받을 수 있다면, 그 믿음이 배신당함에 따라 발생하는 고통 역시도 믿은 만큼이라면, 나는 그만큼만 그 사람을 믿고 사랑했던 것이다. 내가 그 '믿음'을 배신했던 이유는 애초에 나의 사랑(믿음)의 크기가 작아서였고 그래서 그 작았던 믿음의 크기만큼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외면했던 이유는 그만큼의 믿음과 사랑보다 가해자의 고통을 마주하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다. 너보다 내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배신의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다. 나 역시 누군가를 좋아했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과거 속에 빠져 살고 있다. 글은, 한 가지 주제에서 나아가지 못했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쓰던 글을 되돌리고 지우고 몽땅 삭제하고. 현재보다 기억 속에서가 오히려 더 현실같은 사람들과. 글과 주고 받았던 연락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귀여운 모습들. 증오덩어리들. 지금은 멈춰있는 사라져버린 자취. 진부한 말, 행복했던 추억. 눈물짓던 추억, 같은 말들로 밖에는 써내려 갈 수밖에 없는 그런 기억들.
나는 이제 믿고 싶다. 믿어주고 싶다.